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4·10 총선 후보 공천 면접에 참석하고 있다. 2024.1.31/뉴스1

국방부 산하 싱크탱크인 한국국방연구원이 2021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약 수립을 불법 지원했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가 나왔다. 법에 따라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방연구원 임직원들이 오히려 공적 자원을 동원해 특정 정당 정치인을 도왔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이들이 이 후보를 돕는 과정에서 국방 관련 비밀 자료를 무단으로 활용하고 유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위한 참고 자료를 검찰에 넘겼다. 국방연구원은 “비밀 자료를 유출한 적이 없고, 여야의 정책 자문에 응했을 뿐”이라며 감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31일 감사원이 공개한 ‘부패행위 신고사항 등 조사’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방연구원 김윤태 원장은 2021년 3월 세종연구소 부소장인 김모씨로부터 ‘이 후보를 위해 국방 정책 공약을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예비 경선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김씨는 앞서 국방연구원 상급 기관인 국방부에서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고, 2021년 10월 이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자 이 후보 대선 캠프의 국방정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공약 개발 요청을 받은 김 원장은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A씨를 원장실로 불러 김씨에게 소개하고, ‘김씨가 이 후보의 대선을 돕고 있으니 잘 도와주라’고 했다. 김씨가 갖고 온 이 후보의 모병제 공약 문서를 A씨에게 보여주며 검토해보라는 지시도 했다.

국방연구원의 다른 책임연구위원 B씨와 센터장 C씨, 실장 D씨 등도 이 후보 공약 개발에 동원됐다. 이들은 A씨가 이 후보의 모병제 공약 문서를 분석해 만든 ‘모병제 쟁점 및 정책 방향’이라는 문서를 공유받고, 국방연구원으로 온 김씨를 직접 만나 모병제 공약에 관해 조언을 해줬다.

이후의 공약 개발은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의 ‘북한산등산모임’이라는 이름의 대화방을 통해 이뤄졌다. 이 대화방은 등산을 위한 친목 모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후보 캠프 관련 인사들과 김 원장 등 국방연구원 인사들로 이뤄진 대화방이었다. 김씨는 감사원 조사에서 ‘북한산등산모임 대화방은 시간이 지나면서 선거 캠프와 같은 성격으로 발전했다’고 진술했다.

김 원장은 군사 분야 이슈를 정리한 문서를 대화방에 올려 캠프 관계자 및 A·C씨와 공유하고, 캠프 관계자들이 올린 공약 문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 원장의 주선으로, 캠프 관계자들과 국방연구원 임직원들이 같이 공약 개발을 위한 화상 회의를 하기도 했다.

김 원장은 아예 중앙선관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는 공약 문서 양식에 맞춰 공약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정책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첨단 과학기술 적용, 미래형 강군 건설’이었고, 슬로건은 ‘미래형 첨단 강군 건설, 튼튼한 안보 구현’이었다. 주요 내용으로는 ‘신군사혁신 구상 개념 수립’ ‘군사혁신단 설치’ ‘획득제도 개선’ ‘국방 R&D 예산 확대’ 등이 언급됐다. 이 내용은 이 후보의 국방 분야 공약으로 반영됐다.

A씨는 2021년 8월 미군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 재배치해야 하는지를 두고 여야 대선 경선 후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자, 이 후보 캠프를 위해 ‘전술핵 Q&A’라는 제목으로 예상 질의응답 문서를 작성해주기도 했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가 주장하는 ‘나토식 핵 공유’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2021년 11월에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추가 배치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자, 여기에 반박하는 논리를 담은 문서를 만들어줬다. C·D씨도 이 후보의 ‘스마트 강군’ 추진 공약, 병영 환경 개선 공약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감사원은 김 원장을 비롯한 국방연구원 임직원들이 이 후보 캠프의 대선 공약 개발을 도와준 행위가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됐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가 대선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난 뒤에 적발돼, 공소 시효가 지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감사원은 국방연구원 임직원들이 대선 공약 개발을 도와 달라는 김씨의 부탁을 들어준 행위가 청탁금지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고, 이와 관련한 수사 참고 자료를 검찰에 보냈다. 또 국방부 등에 김 원장을 해임하고, 이 후보 공약 개발에 관여한 국방연구원 직원들을 징계하라고 통보했다.

감사원은 감사 과정에서 국방연구원 임직원들과 이 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문서에 무기 제원 등 비밀에 해당하는 정보가 포함된 사실도 확인했다. 이에 따라 감사원은 국방연구원 임직원들이 이 후보 공약 개발 과정에서 군사비밀보호법을 위반해 비밀 자료를 무단으로 활용하고 유출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관련 참고 자료도 검찰에 보냈다고 밝혔다.

김윤태 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국방연구원은 비밀을 유출한 바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대해선 “대선 기간에도 저희는 여러 정책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는데, 일부 선을 넘은 연구원들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며 “그런데도 모두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처럼 결론을 낸 것은 상당히 부적절하다”고 했다. 김 원장은 “감사원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고, 저와 연구원들 모두 감사원에 재심 요청을 하고 법적으로도 다툴 것”이라고 했다.

김 원장은 감사원이 이 후보 대선 공약 수립 논의가 이뤄졌다고 판단한 텔레그램 대화방 ‘북한산등산모임’에 대해, “처음에는 이 후보 공약 관련 이야기가 없었고, 일부 이 후보 캠프에 참여하려는 의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 대화방을 나왔다”고 주장했다. 다만 감사원은 김 원장이 김씨가 공약 개발을 요청한 2021년 3월 이후에도 대화방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김 원장은 “대화방에서 일부 캠프에 참여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질문한 내용들에 코멘트를 몇 번 해줬을 뿐”이라며 “그런 정도를 해임에 해당하는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으로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부적절하다”고 했다.

김 원장은 당시 국방연구원이 국민의힘 측의 자문 요청에도 민주당에 대해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응했다며, “국민의힘 쪽에서 한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민주당 쪽이 한 것만 갖고 이렇게 감사한다는 것은 감사원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한 감사라는 것”이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