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윤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이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상수도관 부식 억제 장비 관련 부패 신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낡은 수도관에서 녹물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상수도관 부식 억제 장비’ 가운데 2016년 9월 이후 설치된 502개가 모두 미인증 장비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방자치단체 48곳이 이런 미인증 장비를 설치하는 데 124억원을 낭비했고, 일부 지자체는 장비가 성능 인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설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28일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지자체들이 성능이 확인되지 않은 고가의 부식 억제 장비를 상수도관에 설치해 예산을 낭비했다’는 내용의 부정부패 신고가 권익위에 들어왔다. 권익위가 지난해 5월부터 전국 지자체에 실태 조사를 해보게 했더니, 광역자치단체 1곳과 기초자치단체 47곳이 2016년 9월부터 현재까지 7년여간 미인증 부식 억제 장비 502개를 상수도관에 설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식 억제 장비는 수도법에 따라 한국물기술인증원으로부터 적합성 인증을 받아야 한다. 인증 기준에 따르면 부식 억제 장비는 부식 억제율이 25% 이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2016년 9월 이후 국내에서 이런 인증을 받은 제품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미인증 부식 억제 장비들은 조달청 나라장터를 통해 지자체와 공공기관에 납품됐다. 나라장터에는 이 장비들에 대해 ‘옥내 상수도용으로는 쓸 수 있어도 옥외 상수도용으로는 불가하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으나, 일부 지자체는 이런 설명을 무시하고 장비를 구매해 옥외 상수도에 쓴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낡은 상수도관을 교체하는 데 큰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상수도관 노후화로 녹물이 발생해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오면, 상수도관 교체보다 저렴한 부식 억제 장비를 설치해놓고 주민들을 달랬던 것이다. 그러나 미인증 장비 가운데에는 부식 억제율이 14%에 그치는 등 성능이 기준에 크게 미달한 장비도 있었다. 녹물이 나오지 않게 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지자체 담당자들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며 장비를 구매해 설치했다고 한다.

미인증 장비 설치는 경북이 270곳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 112곳, 경남 57곳, 전북 37곳 순이었다. 경북 영덕군이 37곳에 13억1900만원, 경주시가 20곳에 9억4700만원, 칠곡군이 21곳에 8억200만원, 경기 의왕시가 49곳에 5억6200만원어치 미인증 장비를 설치했다. 서울과 부산, 인천, 대전, 대구, 충북, 제주 등에는 미인증 장비가 설치되지 않았다.

권익위는 지난해 경찰에 미인증 장비를 판매한 업체들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고, 경찰은 업체 3곳을 적발해 지난해 12월 검찰에 넘겼다. 권익위는 또 환경부에 미인증 장비 실태 조사 결과를 알리고 관리·감독과 후속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정승윤 권익위 부패방지 담당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은 “국민이 안심하고 수돗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능이 확인된 제품이 상수도관에 설치돼야 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국민의 안전한 삶을 위협하는 부패행위 근절을 위해 권익위가 앞장서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