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이 2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악성 민원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공무원들을 괴롭히는 ‘악성 민원인’이 전국적으로 2784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 3~5월 전국의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총 309곳을 대상으로 악성 민원인 실태를 조사한 결과, 3월 기준 악성 민원인 2784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일 밝혔다.

가장 많은 유형은 업무 담당 공무원의 개인 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수백 통 보내는 등 상습적·반복적으로 민원을 제기해 공무원을 괴롭히는 유형으로, 1340명(48.1%)이 확인됐다. 국토교통부 한 부서에는 민원인 300여명이 자기가 사는 지역에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가 들어올 수 있게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해달라는 민원을 돌아가면서 넣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혼자서 GTX 예타 면제 민원을 100차례 이상 넣은 민원인도 있었다. 국방부는 ‘내가 조선 궁녀였고, 전 재산을 일본 천황에게 빼앗겼다’며 조치를 요구하는 민원인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민원인은 담당 공무원에게 50차례 이상 연락해 신문 기사와 사진, 도서 등을 보냈다.

한 민원인은 서울시에 ‘도로에 전동 킥보드가 불법적으로 방치돼 있으니 치워달라’고 요청했다. 문제는 ‘2~3시간 내에 치우라’는 조건을 걸었다는 점이다. 서울시가 이 민원인이 임의로 정한 ‘제한 시간’을 맞추지 못하자, 이 민원인은 서울시가 킥보드를 제때 치우지 못했다고 문제 삼는 민원을 수천 건 제기했다. 서울 영등포구에선 한 기초생활수급자가 ‘돈을 더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면서 하루에 10~20차례씩 주민센터에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중랑구에도 ‘차상위계층에서 탈락해 복지 혜택을 못 받게 됐다’ ‘공공근로를 신청했는데 불합격했다’며 민원을 900여건 낸 민원인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공무원에게 직접적으로 폭언이나 폭행을 가하는 민원인도 1113명(40.0%)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 민원인은 교정시설에 있는 수용자를 면회하게 해 달라고 교정당국에 요구했다가 ‘절차에 어긋난다’며 거절당하자 공무원에게 살해 협박을 했다. 다른 민원인은 자신의 상이등급이 하향 조정돼 보훈 혜택을 덜 받게 됐다며 국방부 공무원에게 ‘유언장에 네 이름을 적고 자살하겠다’ ‘고소하겠다’ ‘퇴근할 때 조심해라’ 등의 협박을 했다.

6·25전쟁에서 숨진 군인·경찰의 자녀인 한 민원인은 2022년까지 본인이 맏이로서 받아온 ‘6·25 전몰 군경 자녀 수당’을 법 개정으로 지난해부터 다른 형제자매들과 나눠 받게 되자, 국가보훈부 공무원을 12차례 폭행했다. 이 민원인은 공무원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위협하는가 하면, 침을 뱉고 할퀴기까지 했다.

울산 동구 주민 여러 명은 어린이보호구역 등에 불법 주·정차를 해놓고 이를 단속하는 공무원에게 되레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른 10여명은 숨겨뒀던 소득이 파악돼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자, 주민센터의 복지 담당 공무원에게 욕설과 협박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성북구 한 주민은 주민센터를 방문해 민원 서류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아무 이유 없이 창구 공무원에게 욕설을 했다. 민원행정팀장이 나서서 이를 제지하자, 팀장의 멱살을 잡고 폭행했다. 전북 전주시에선 교도소에서 출소한 주민이 복지 혜택을 신청하면서 ‘불필요한 서류를 많이 요구한다’며 담당 공무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담당 공무원의 실명을 인터넷 등에 공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항의 전화를 넣어달라’고 독려하는 등 이른바 ‘좌표 찍기’를 하는 민원인도 182명(6.5%) 포착됐다. 80명(2.9%)은 정보공개청구 제도를 악용해, 공무원들에게 수백에서 수천 건의 정보공개청구를 넣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 재소자는 자신의 가석방이 불허되자 법무부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만 1000차례 넘게 했다.

이런 악성 민원인은 기초자치단체를 상대로 하는 경우가 1372명(49.2%)으로 가장 많았다. 중앙행정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악성 민원인은 1124명(40.4%), 광역자치단체와 시·도교육청을 대상으로 하는 악성 민원인은 각각 192명(6.9%), 96명(3.4%)이었다. 또 226개 기초자치단체 중에선 울산 동구(52명)와 서울 영등포구(47명), 인천 서구(42명), 49개 중앙행정기관 중에선 국토부(713명)와 법무부(116명), 검찰(87명), 국방부(48명), 17개 광역자치단체와 시·도교육청 중에선 서울시(67명)과 서울교육청(41명)에 악성 민원인이 많았다.

그런데도 전체 기관의 45.3%(140곳)는 최근 3년 새 악성 민원인 대처 방법에 관한 교육을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았고, 관련 교육을 실시했다는 기관 다수도 ‘친절 교육’만 하고 악성 민원인 대처 교육은 사실상 하지 않았다고 권익위는 지적했다.

권익위는 이번 실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악성 민원에 대해 유형별 대응 방안을 마련해 다른 기관들과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태규 권익위 부위원장은 “일선 공무원들이 악성 민원으로 상당한 고통을 받고 있다”며 “앞으로 권익위는 일선 공무원들이 악성 민원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교육과 컨설팅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