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9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양곡관리법·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 등 야당이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일방 처리한 6개 법안을 심의한다. 한 대행은 이 6개 법안에 대해 대통령의 법률안 재의 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2004년 고건 전 총리 이후 두 번째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 때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 고 전 총리는 사면법·거창사건법 개정안에 대해 위헌 소지가 있거나 국가 재정 부담이 크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 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법안은 양곡관리법·농수산물가격안정법·농어업재해대책법·농어업재해보험법 개정안 등 이른바 ‘농업 4법’과 국회증언감정법·국회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들이 국가 재정과 국민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시장경제 원리를 거스른다는 것이다. 한 대행은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6개 법안에 대한 재의를 요구하는 구체적인 사유를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행은 이달 12일 국회에서 가결된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여부도 고심하고 있다. 이 법안들에 대한 거부권 행사 시한은 내년 1월 1일이다. 정부는 이 법안들도 특별검사 후보 추천권을 야당이 독점한다는 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한 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한 대행에 대한 탄핵소추를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거부권이 행사되면 법안들은 국회로 되돌아간다. 국회가 이 법안들을 법률로 만들려면 법안들을 각각 재표결에 부쳐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여당 국민의힘이 동의하지 않으면 재표결을 통과할 수 없고, 법안은 폐기된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9일 국무회의를 통해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농업 4법은 쌀 등 특정 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에게 제도적으로 특혜를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값이 평년 가격보다 급격하게 내려가는 경우에 농협이 시장 수요보다 많이 공급되는 쌀을 의무적으로 사들이도록 했다. 농협이 쓴 돈은 국가가 메워준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쌀값을 떠받치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서 쌀이 이미 과잉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런 상황에서 이 법안이 시행되면, 농민들이 불필요하게 벼농사를 계속 짓고, 이로 인해 내려가는 가격을 국가 재정을 쏟아부어 지탱하는 악순환이 벌어질 것이라며 반대한다. 기획재정부는 쌀을 사들이는 데 2030년까지 연평균 1조원을 쓰게 될 것으로 추정한다. 쌀 저장 비용도 수천억원 발생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정부 부처들은 민주당 정부 시절에도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반대했다.
농수산물가격안정법 개정안은 다른 농산물에도 양곡관리법과 비슷한 ‘가격 안정’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특정 농산물의 ‘기준 가격’을 정하고, 해당 농산물 가격이 그 아래로 떨어지면 해당 농산물 생산자에게 이로 인한 손해를 국가 재정으로 보상해 주게 한다.
농어업재해대책법 개정안은 농민이 재해를 당해 농사를 망치면, 해당 작물을 기르는 데 들어간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정부가 보상해 주게 하는 것이다. 농어업재해보험법 개정안은 농어업재해보험에 가입한 농민이 자연재해로 농작물 피해를 봐서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한 경우, 이후 보험사가 보험료를 할증해 받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농민이 자기 농작물 피해 규모를 산정하는 손해평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것을 보험사에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다. 정부는 다른 어느 분야에서도 자연재해 피해를 정부가 무제한으로 보상해주지 않으며, 보험 시장 원리에 어긋나는 내용을 법으로 강제하지는 않는다며 반대한다.
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은 국회가 증인·참고인 출석이나 서류 제출을 요구했을 때, 개인정보나 영업비밀 보호를 이유로 이를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해외 체류 중일 때라도 국회가 부르면 화상 연결 방식으로라도 출석해 증언해야 한다. 재계는 이 법안이 시행되면 기업 관계자들이 수시로 국회로 불려나가게 되고, 기업 비밀이 국회를 통해 경쟁국 등으로 새어나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회법 개정안은 ‘폭력 국회’를 끝내고 국회를 정상화하자며 도입한 ‘국회 선진화법’의 ‘예산안 부수 법안 자동 부의(附議) 제도’를 없애는 것이 골자다.
각 법안의 소관 부처들은 12·3 비상계엄 사태 전부터 이 법안들에 반대해 왔다. 한 대행도 지난해 3월 정부로 넘어온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은 농민과 농업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강하게 반대한 바 있다. 이 법안은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후 폐기됐으나, 22대 국회에서 다시 정부로 왔다. 한 대행은 6개 법안이 국가의 미래에 해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민주당으로부터 탄핵소추를 당하게 되더라도 거부권을 반드시 행사하겠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다만 국무총리실은 이 6개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와 내란 특검법, 김 여사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별개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6개 법안은 정책에 관한 법안이지만, 2개 특검법은 윤 대통령 탄핵 정국과 연관된 법안이다. 한 대행이 경찰에 의해 내란죄 피의자로 입건된 상황도 부담이다. 또 6개 법안은 거부권 행사 시한이 21일인 반면, 2개 특검법은 내년 1월 1일까지 시간이 있다. 총리실은 2개 특검법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거부권 행사 여부를 고민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