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애 통일부 부대변인이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 진행된 이산가족상봉 협상 과정 등을 담은1980년도 남북대화 사료를 공개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문서는 1981년 12월부터 1987년 5월까지의 인도 분야와 체육 분야 남북회담 내용을 담고 있다./연합뉴스

북한이 6·25 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납북한 우리 어선은 총 461척으로 작년 말 기준으로 457명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가 2일 공개한 1980년대 남북회담 사료집에 따르면, 북한은 6·25 이후 1987년 5월까지 우리 어선 459척을 납북했고 승선원 3651명을 끌고 갔다. 이 가운데 427척, 3232명은 남한으로 송환됐으나 32척에 승선한 419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419명 중에서 침몰 등에 따른 사망·실종자를 제외하고 북한에 억류된 인원은 총 403명으로 집계됐다.

1987년 이후에도 태양호(1989년)와 명성2호(1989년) 두 척이 추가로 납북돼, 작년 말 기준으로 미귀환자는 총 457명에 이른다. 북한의 남한 어선 납북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시기는 6·25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였다. 1968년에만 총 90척이 납북돼 756명이 끌려갔다. 당시 북한은 납북 몇 달 뒤 관영매체를 통해 이를 공개하면서 해당 어선의 착오 또는 조업 중 북측 해역 침범에 따른 단속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1981~1987년 남북회담 관련 기록에는 북한이 대북전단(삐라) 문제에 반발하며 회담장을 난장판으로 만든 일화도 담겨 있다. 북한은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이후 돌연 LA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제의해왔다. 이후 남북회담에서 북한은 우리 측 대표단에 “이게 뭐야. 이거 보라”며 판문점 일대에서 수거한 전단 꾸러미를 냅다 던지며 소리를 질렀고 우리 측 대표단은 “누구한테 무례한 짓을 하고 있어”라며 전단을 되던졌다.

우리 측 회담 대표는 북측 대표에게 “귀측의 부자세습 왕조 구축과 우상화는 공산권 내부에서도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했고, 북측 대표와 북측 취재진은 고성과 욕설을 쏟아내며 회담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상황이 기록된 회담문서에는 “심지어 북한 측 대표들은 우리 측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 우리 측 대표에게 성냥갑을 던졌다”며 “북한 기자들까지 합세해 기물로 책상을 계속 두드리고 우리 측 대표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