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날 기념식'에서 영상을 시청한 후 눈을 만지고 있다. /뉴시스

14일은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이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국내 정착 탈북민은 총 3만4078명. 정부는 이 중 특히 MZ세대 탈북민에게 주목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의 MZ세대는 국가 배급이 아닌 자력으로 살아온 ‘장마당 세대’”라며 “단속을 피해 남한 영상을 보고 말투를 따라 하는 청년 세대가 김정은 체제 균열의 단초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고 했다.

그래픽=이진영

본지는 2022년 유럽 지역에서 유학 중 함께 탈북한 평양 출신 20대 여성 3명과 만나 북한 생활과 탈북 이유 등에 대해 들어봤다. 올해 국내 대학에 입학한 정유미씨(24)와 신지은씨(23),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인 한지민(24)씨와의 만남은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이뤄졌다. 이들은 평양에 가족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명을 쓰고 얼굴 공개를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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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평양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인기였나.

“밖으로 소리가 들리면 안 되니 이불 뒤집어쓰고 이어폰 꽂고 봤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신사의 품격’을 가장 재밌게 봤는데 하지 말라는 걸 몰래 하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한씨)

“학교 가면 친구들은 전부 남한 영화·드라마 본 얘기만 했다.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의 차이였지 대부분 다 봤다. 김주애(김정은 딸)도 봤을 것이다.” (신씨)

ㅡ한국 드라마는 어떻게 처음 접했나.

“열 살 때 친구네 집 놀러갔을 때 친구 언니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한국 드라마인 줄 몰랐다. 중국어 자막이 나오고 소리는 아주 작게 틀어놨는데 ‘고마워요(북한에선 ’~해요’ 말투 안 씀)’ ‘괜찮아(북한말은 ‘일없다)’ 이런 말이 들리더라. 분명히 우리말 같은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투여서 깜짝 놀랐다.” (정씨)

“엄마가 고등학생 될 때까지는 한국 말투 따라 할까 봐 소리는 못 듣게 하고 화면만 보게 했다. 고1 때 처음 본 한국 드라마가 ‘드림 하이’인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많아서 정말 신나고 재밌었다. 이후 웬만한 한국 드라마는 거의 다 봤다. (한씨)

ㅡ조선중앙TV나 노동신문은 안 봤나.

“재미없어서 안 봤다. 사람들 대부분 안 본다. 거기서 하는 얘기가 죄다 거짓말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다 안다.” (정씨)

ㅡ김정은이 남한 말투 사용을 금지하는 법까지 만들었는데.

“‘안녕’(남한식 인사)도 안 되고 ‘괜찮아’도 안 된다는 거다. 남한 말투를 따라 하지 말라니 우리가 쓸 말이 없더라. 머리 염색도 안 되고 옷차림도 반바지는 안 되고 말투도 이래라저래라. 한국 오니까 그런 제약이 없어 너무 좋다.” (신씨)

“드라마 본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되나. 폭동 일어나면 좋겠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다음 날 사라지니까 사람들이 무서워서 말을 못 하는거지 누군가 총대만 메준다면...” (정씨)

ㅡ북한에 있을 때 단속당한 경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언니 휴대전화 들고 밖에 나갔다가 보안원한테 걸렸는데 언니가 친구 번호를 별명으로 저장한 게 문제가 됐다. 별명은 사용하지 말라는 거다. 집에 안 보내줘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한씨)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드라마 보다 걸리면 (뇌물) 30~50달러면 해결됐는데 지금은 엄청 올랐다. 사람들이 반농담으로 ‘한국 드라마 보려면 옆에 만달러는 놓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한씨)

ㅡ학교 수업은 어땠나.

“학교에서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를 가르치는데 정말 쓸데없는 걸 억지로 외우게 했다. 잘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김일성·김정일 시절 옛날 일을 다 외워야 했다.” (한씨)

ㅡ김정은이 김주애를 자주 데리고 나오는데.

“다들 안 좋게 본다. 할아버지뻘 되는 군 간부가 어린애한테 무릎 꿇고 이야기하고 그게 뭔가.” (정씨)

“북한에 김주애처럼 살집 있는 애들 많지 않다. 김정은이 ‘주먹밥’ 먹는다고 해도 북한 사람들 안 믿을 거다.” (신씨)

ㅡ북이 오물풍선 날려보낸 건 어떻게 봤나.

“종이도 부족한 나라에서 먹고사느라 바쁜 사람들 불러모아 안 해도 되는 일 시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또래도 동원됐을 것 같고.” (정씨)

ㅡ한국 와서 지내보니 어떤가.

“여기 와서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였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어차피 각자 알아서 시장에서 돈 벌고 먹고살아야 했고, 국가에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탈북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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