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정치참사. /김지호 기자

지난해 탈북한 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정치참사는 지난 14일 본지 인터뷰에서 “(올 초) 한국·쿠바 수교에 대해 김정은은 큰 충격을 받고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쿠바는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나라라는 상징성 때문에 김정은이 특히 중시했다”고 했다. 리 전 참사는 인터뷰에서 “이 자리를 빌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북한의 고위 정책 결정자들, 지도부에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핵미사일로 체제를 유지하겠다며 어느 날은 중국에 붙었다가 또 어느 날은 러시아에 붙었다가 이런 식으로 체제를 하루살이 임시방편으로 유지하지 말고, 차라리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도 투명하게 모든 걸 열어놓는 쿠바의 길을 가기 바란다”고 했다.

“김정은, 한국·쿠바 수교에 배신감”

–많은 탈북민이 탈북 동기로 ‘자녀’를 든다.

“외교관 자녀들은 해외에서 생활총화(상호·자아비판)나 학습(사상 교육)에 참여하긴 한다. 하지만 대부분 시간을 현지 아이들처럼 생활한다. 발언이나 옷차림을 조심하거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북한에 있을 때처럼) 행사나 무보수 노동에 동원되는 스트레스가 없으니 애들이 쑥쑥 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을 다시 북한에서 살게 하는 게 부모로서 할 일인가’ 하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다.”

–애들이 쑥쑥 큰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신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해외에 자녀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평양으로 돌아와 학교에 입학시키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게 있다. 북한에서만 살던 동급생 아이들보다 키가 5~10cm 정도 크고 피부 때깔도 다르다. 북한에서는 먹기 어려운 고기·우유 같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외국에서 많이 섭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탈북 결심할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

“가장 어려운 일은 아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탈북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아내에게 넌지시 ‘북한에 가지 말고 다른 곳에서 살아볼까’라고 물어봤는데, 아내가 깜짝 놀라서 ‘그러다 큰일 나면 어떻게 하려 그러냐’고 하더라. 아내가 며칠 동안 내 거동을 살피며 불안해하다 심장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래서 ‘전에 한 얘기는 농담이고 절대 그럴 일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안심시킨 뒤 혼자 탈북 계획을 세웠다.”

–쿠바에서 한국 현실은 어떻게 접했나.

“많은 북한 주민이 한국 매체를 통해 한국 현실을 알게 된다. 쿠바에도 한류가 불어서 한국 예능 프로나 드라마를 복사해 파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대사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프로그램) 제목만 알려주면 오후에 ‘구해 놓았다’고 연락이 온다. 그렇게 사서 봤다.”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런닝맨’이 가장 재미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은 유재석과 지석진이다. 처음엔 미국 영화를 많이 보다 한국 드라마·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미국 영화는 잘 안 봤다.”

– 동료들과 같이 보기도 했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한다. 하지만 해외에 가면 100% 한류를 접한다.”

–요즘엔 무엇을 재미있게 보고 있나.

“한국에 온 뒤 요즘 가장 재미있게 보는 건 탈북민들이 나와서 자기들 얘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북한에서는 상류층으로 생활해 오다 보니 지방의 현실, 어려운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 잘 몰랐다. 한국 와서 그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보면서 이전에 내가 가졌던(누렸던) 편애(혜택)에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

“쿠바는 북한 같은 독재국가 아니다”

–쿠바는 북한과 어떻게 다른가.

“쿠바는 북한 같은 독재국가는 아니다. 유엔헌장과 국제법 등을 존중하는 국제 관계의 표본 같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바에서 생각을 달리하거나 정부를 비난했다고 해서 처벌받던 시기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쿠바가 수년간 제네바 유엔인권이사회 회원국으로 선출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쿠바 공들인 金, 최고 지도자 방북 때 카퍼레이드 - 2018년 1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북한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무개차를 타고 평양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한·쿠바 수교는 어떻게 봤나.

“쿠바는 풍부한 지하 자원과 발달한 관광 환경 등을 보유한 잠재력과 실용성이 매우 큰 나라다. 한·쿠바 수교는 커다란 정치적·경제적 혜택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과 쿠바의 수교 의의에 대해 ‘북한의 고립, 북한을 상대한 체제 경쟁의 승리’ 등으로 표현한 기사들을 봤는데 이는 맞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 사이에 ‘경쟁’이란 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한·쿠바 수교에 북한 내부 충격이 컸을 것 같다.

“한·중, 한·소(러시아) 수교 때만큼은 아니지만 충격은 컸다. 김정은은 특히 쿠바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나라라는 상징성 때문에 중시했다. 작년에 당시 박진 외교부 장관이 과테말라에서 쿠바 외교부 차관을 만나 면담한 내용이 한국 언론에 보도됐는데, 대사관에서 이를 놓친 적이 있다. 바로 평양에서 ‘한국이 쿠바와 수교 논의를 했다는데 대표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추궁하는 전문이 올 정도였다.”

–한·쿠바 수교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나.

“2022년에 내가 이미 ‘쿠바가 경제가 어려워서 한국과 깜짝 수교한 베트남의 경험을 배울 수 있으니 수시로 상황 체크를 해야 한다’고 당에 보고했다. 외무성 간부들은 수교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당 간부들은 그렇지 않았다.”

–쿠바 주재 북한 대사도 소환됐는데.

“올해 2월 북한이 마철수 쿠바 주재 대사를 소환한 것은 현지 대사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려는 국제부와 외무성 간부들의 술책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 부모 없이 조부모와 살던 마 대사의 손자가 쿠바에서 미국에 가려다가 실패해 북한으로 끌려갔는데, 그 책임과 나의 탈북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한국 음식은 입맛에 맞나.

“(북한 외교관으로) 멕시코에 있을 때 한국 식당에 가 봤는데 맛이 없어서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먹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다 맛있더라. 한국에 와서 거의 매일 먹는 게 국수다. 북한 국수는 밍밍하고 무슨 맛인지 모르는데 국수가 너무 맛있다. 한국 마트에서 파는 봉지에 든 평양냉면이 맛있어서 매일 사 먹는다.”

“동료들도 암흑의 땅에서 빠져나오길”

–미국 등 제3국행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한 때부터 한국 외에 다른 곳을 선택지로 고려해 본 적이 없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한 민족이 사는 곳 아닌가. 이 믿음은 쿠바를 떠난 후 도착한 제3국에서 나의 탈출에 도움을 주신 한국 대사님을 만난 순간 확신으로 굳어졌다.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이런 게 단순한 말 같은데 진짜 사람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북한과 해외에 남아 있는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대한민국에 와서 보니 (탈북이라는) 거대한 모험을 할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고 늘 그립다. 북한에는 미래가 없다. 그 저주 같은 암흑의 땅을 버리고 밝은 세상으로 나올 용기를 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