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15일 최재해 감사원장이 서울 감사원 회의실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감사원 수뇌부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최 원장의 경과 보고서가 채택된 다음 날 ‘내부 제보자 색출’을 이유로 간부들의 통화 기록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번 감사원의 내부 제보자 색출 작업은 최 원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여야 합의로 경과보고서가 채택(작년 11월 2일)돼 사실상 그가 감사원장으로 정해진 바로 다음 날 이뤄졌다. 관가에선 “감사원장 인사청문회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참았다가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전격 지시한 것” “청와대나 최 원장의 지시 없이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란 얘기가 나왔다.

전직 감사원 간부들은 “모든 간부의 통화 내역 조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정부 부처와 공기업 등 총 6만여 기관의 감사를 지휘하는 감사원 간부들에 대한 통화 내역 조회는 ‘감사 의지’를 위축시키는 외압으로 비칠 수 있어 감사원에선 사실상 금기시돼 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전 정권에서도 감사원장이 특정 간부 통화 내역을 지시한 일이 한두 차례 있었지만, 그마저도 내부 반발로 무산된 걸로 안다”고 했다.

감사원 주변에선 “현재 감사원의 정치적 독립성, 중립성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란 말이 나온다. 헌법과 감사원법상 감사원은 독립된 최고 감사 기관이지만, 실상은 청와대 현직 비서관 한 명의 ‘감사위원 내정설’ 의혹이 야당에서 나왔다고 간부 31명 전원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뒤질 정도로 독립성이 허물어져 있다는 취지다. 이 31명 중엔 언론을 상시 접촉하는 대변인도 있었다. 감사원 내부에서도 “감사원이 청와대 눈치를 너무 봐서 존재감이 없어졌다” “정권에 부담될 수 있는 감사는 아예 안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달 17일 현 정권의 대표적 ‘탈(脫)원전 사업’ 중 하나인 새만금 수상 태양광 사업 감사 결과 발표가 그 사례다. 당시 감사원은 이 사업 실무를 맡은 한국수력원자력이 불법·특혜라는 걸 알면서도 2019년 무면허 업체인 현대글로벌에 수의계약으로 228억원짜리 새만금 태양광 설계 사업을 몰아줬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한수원에 이런 특혜를 주라고 압박한 ‘윗선’이 있었는지 등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이는 ‘면죄부 감사’ 논란으로 이어졌다.

감사원은 ‘내부 제보자 색출’이 어떤 경위로 이뤄진 것이냐는 본지 질의에 대해 “사무총장이 공직 기강 확립 차원에서 고위 간부 전원의 통화 내역 제출을 지시했고, 본인도 솔선수범 차원에서 자기 통화 내역을 스스로 제출했다”며 “최 원장이 지시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통화 내역 제출도 고위 간부 전원의 동의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감사원 사무총장이 청와대 비서관 관련 제보자 색출을 위해 ‘대통령의 임명’이라는 요식 절차만 남겨둔 감사원장의 승인이나 묵인 없이 혼자만의 판단으로 전례 없는 ‘전 간부 통화 내역 조회’를 지시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선 “청와대 지시가 있었을 수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부터 수시로 공직자들 휴대전화를 압수해 종종 논란을 일으켰다. 2017년 말 청와대 특별감찰반은 외교부 간부 10명 휴대전화를 제출받아 사생활 감찰까지 했다. ‘사드 논란’ 언론 보도와 관련한 보안 조사라는 이유를 댔지만, 당시 외교부에선 “업무용 전화는 다 감청이 된다고 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 이듬해엔 국민연금 개혁안 유출 건과 관련해 보건복지부 연금정책국 소속 공무원들의 휴대전화를 털었다.

청와대는 2019년 5월 한 야당 의원이 비공개였던 한미 양국 대통령 간 정상회담 조율 대화를 언급하자, 공무원을 상대로 대대적인 휴대폰 통화 내용 등을 조사하기도 했다. 내부 정보 유출이라는 명분으로 색출 작업을 벌인 것이다. 당시 야당은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백원우 민정비서관을 직권남용 및 강요 등 혐의로 고발했다. 청와대 특감반이 언론 유출자를 색출한다면서 외교부, 교육부, 기획재정부, 해양경찰청, 복지부 등 공무원들의 핸드폰을 무단 압수하고 포렌식했다는 것이다. 감찰이 일상화되면서 공무원들의 청와대 눈치 보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민간인 사찰 금지를 명목으로 국가정보원의 국내정보담당관(IO·Information Officer) 직을 폐지했다. 그러나 2018년 말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 출신 김태우 수사관이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했고, 그 과정에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태가 터졌다. 당시 청와대는 이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이 사건으로 김은경 환경부 전 장관은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수사관은 당시 “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이명박, 박근혜 청와대보다 민간 영역 사찰을 더 많이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