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4일 한미 국회의장 회담 후 남북 군사 대치의 상징적 현장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는 JSA에서 1976년 북한군의 ‘도끼 만행 사건’이 있었던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등도 돌아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강력한 대북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풀이됐다. 윤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의 JSA 방문은 한미 간 강력한 북한 억지력의 징표”라고 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공동언론 발표를 통해 김진표 국회의장과의 회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뉴스1

펠로시 의장은 자신을 수행하는 미 하원의원들이 ‘전방 군사 대치 현장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자 “동맹국 한국의 안보 현장은 꼭 봐야 한다”며 판문점 방문 일정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북한의 위협에 함께 맞서는 한미 동맹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얘기다. 펠로시 의장은 이날 일본에 도착한 뒤 트위터에 “한미는 수십 년간의 우정과 파트너십으로 맺어진 깨지지 않는 유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과거에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겨냥한 강경한 입장을 밝혀왔다. 작년 10월 북한을 겨냥해 ‘불량 국가’라며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판매를 위해 관련 기술을 대대적으로 과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2019년 미국을 방문한 문희상 전 국회의장에게 “나는 북한을 믿지 않는다”며 “북한의 진짜 의도는 비핵화가 아니라 한국의 무장해제”라고 했었다.

펠로시 의장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는 한미 동맹을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동맹”이라고 했다. 최근 준공된 워싱턴DC의 ‘한국전 추모의 벽’을 언급하며 “수많은 사람이 희생으로 지켜온 평화와 번영은 양국이 지키고 가꾸어야 할 의무”라고도 했다. 한미 동맹을 단순 경제적 실리 차원이 아닌 당위론적 ‘도덕 동맹’이라 한 것이다. 펠로시 의장은 그러면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질서를 함께 가꾸어 가자”고 했다. 대통령실은 펠로시 의장과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중국 관련 언급은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맹을 강조하면 인도·태평양의 질서를 얘기한 건 강력한 대(對)중국 연대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됐다.

김진표 국회의장과 회담후 오찬 - 김진표(오른쪽) 국회의장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4일 여의도 국회에서 한미 국회의장 회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날 공동 언론 발표에서“강력하고 확장된 대북 억지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양국 정부의 노력을 지원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덕훈 기자

펠로시 의장은 국회 방문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뒷받침하는 안보 입법뿐 아니라 한미 양국 간 경제·거버넌스(행정) 협력 입법도 논의했다. 김 의장은 “한미 동맹이 군사 안보, 경제, 기술 동맹으로 확대되는 데 주목하며 포괄적인 글로벌 동맹으로의 발전을 의회 차원에서 강력히 뒷받침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진지하게 협의했다”며 “동맹 발전에 대한 양국 국민의 기대를 담아 동맹 70주년 기념 결의안 채택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고 했다.

양국 의장은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지원해주는 법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김 의장은 “첨단 기술 공급망 협력을 인적 차원에서 뒷받침하기 위한 전문직 비자 쿼터 입법화, 한인 입양인 시민권 부여 법안, ‘김치의 날’을 지정하는 김치 결의안, 베트남전 참전 미주 한인에 대한 또 다른 법안 등도 논의했다”고 했다. 펠로시 의장은 “시급한 상황에서 안보상의 위기로 시작된 한미 관계가 따뜻한 우호 관계로 변했다”고 했다. 우리 측 참석자는 “펠로시 의장뿐 아니라 동행한 미국 하원의원들이 각종 다양한 입법 사안을 거론하며 한미 동맹의 강화를 이야기했다”고 했다.

김 의장과의 비공개 회담 때는 김 의장이 북한 문제를 언급하며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심각하다”는 취지로 언급하자 대북 확장 억제의 중요성에 공감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참석 의원은 “펠로시 의장은 중국 인권 문제에도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 거론하지 않았다”며 “대신 우리 측에서 일부 참석자가 북한 인권 문제에 신경을 써달라고 얘기했다”고 전했다.

펠로시 의장의 방한에는 남편·아들이 동행했다고 정치권 관계자는 밝혔다. 동행한 한국계 앤디 김 연방 하원의원도 부인과 함께 국회를 방문했다. 펠로시 의장 일행들은 김 의장, 여야 국회의원들과 함께 이날 국회 사랑재에서 오찬을 했다. 펠로시 의장은 “세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사랑재”라며 “지난 방한 때도 사랑재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정말 좋았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펠로시 의장은 2015년 미국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시절 방한해 사랑재에서 오찬을 했다. 비빔밥, 옥돔구이 등이 나온 국회 오찬에서는 퓨전 국악 밴드가 아일랜드의 록 밴드인 U2의 음악 등을 연주했다. 펠로시 의장은 평소 U2의 음악을 즐겨 듣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