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헌 원장은 “변혁기 노태우 정부가 한 일을 지금이라도 정리해 후대에 남기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육성 회고는 거의 처음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노재헌은 감기에 잔뜩 걸려 있었다. 우리는 에어컨을 끄고 마주 앉았다. 올 초 ‘보통 사람들의 시대 노태우센터’를 출범시킨 뒤 바빠진 모양이었다. 중국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6·29 민주화 선언 36주년 기념 학술 대회’를 지난 6일 프레스센터에서 치렀다. “인터뷰를 무를 순 없겠지요?”라며 웃는 얼굴에 열감이 어렸다. 그를 만난 날은 ‘7·7 선언’ 35주년이기도 했다.

◇'베사메무초’가 음악외교 원조

-창밖으로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모교인 경복고 교정이다. 단풍 들면 정말 멋있다. 저 담장 밑에서 담배들 많이 피웠다(웃음).”

-청와대에서 열리고 있는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 전시에 해설자로 깜짝 등장했더라. 노태우 대통령의 ‘퉁소’를 소개했다.

“정확히는 옆으로 부는 대금인데, 그 시절엔 다 퉁소로 통칭한 것 같다. 할아버지 유품인지, 집에 세 자루 있었는데, 기분 좋으시거나 술 한잔 걸치시면 연주하셨다. 꽤 잘 부셨다.”

-독학으로 배우신 건가?

“아버지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소 몰고 산에 올라 퉁소를 불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셨다고 한다. 음악성이 있으셔서 작곡도 하고 노래도 잘 부르셨다.”

-‘베사메무초’는 노태우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유명하다.

“진짜 애창곡은 88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였다. 시도 때도 없이 부르셔서 우리도 다 따라 불러야 했다(웃음). ‘베사메무초’는 아버지가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시청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그 나라 가수와 함께 불러 난리가 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아메리칸 파이’처럼?

“그렇다. 음악 외교의 원조다(웃음). 물론 윤 대통령이 훨씬 업그레이드됐다. 잘 부르시더라.”

-청와대 생활은 어땠나.

“결혼하고 들어가 잠깐 살았다. 아버지 서재엔 늘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걸 밤늦게까지 읽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직원들 모두 퇴근하고 나면 적막강산이었다. 물 하나 사러 나가기도 어렵고. 사람 살 곳은 아니었다(웃음).”

-대통령 아들들의 회동이 뉴스가 됐다.

“아버지 1주기 때 초청장을 보냈는데 고맙게도 그 먼 데(파주)까지 김홍업, 김현철 이사장님이 와 주셨더라. 박지만 회장님은 그해 11월 김영삼 대통령 7주기에서 처음 뵀는데,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뜻이 모였고, 나이가 어린 제가 총무를 맡았다. 형님들이 밥만 축내지 말고 사회에 기여할 일을 해보자 해서 고민 중이다. 저 사람들 무슨 꿍꿍이야, 하며 우려하는 눈으로 보실 것도 같고(웃음).”

-최근 이승만 기념관 설립 추진위원회에도 합류했더라.

“제가 이승만 대통령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초대 대통령 기념관이 없다는 건 건국을 부정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대통령이란 개인을 떠나서 그 시대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와서 좀 도우라고 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지난 6월 4일 서울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청와대 개방 1주년 기념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여기 대통령들이 있었다' 전시를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이 노 전 대통령의 부스에서 관람객들에게 직접 전시 설명을 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국민에 대한 예의

-2019년부터 매년 5·18 민주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왜 그 시점이었나.

“5·18이 1980년의 일이니 거의 40년을 주저했던 일이다. 두렵기도 했다. 이게 맞는 건가도 싶고. 제일 큰 계기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만큼 아버지 병세가 위중해졌기 때문이다. 저는 5·18에 대한 아버지의 진의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라도 대신 사과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광주의 반응이 두렵지 않았나.

“5·18민주묘역에 들어설 때의 느낌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른 아침이었고 참배객이 거의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더라. 감사하게도 묘역에 계신 분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분향하고 참배한 뒤 기념관도 둘러보게 해주셨는데 마음은 무거웠지만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노 대통령은 아들이 참배하는 모습을 보셨나.

“TV도 못 보고, 말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다녀왔다고 하니 눈만 깜박이시더라. 잘했다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였다.”

-5·18 관련 연극을 관람하다 ‘반성 쇼 중단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사전에 인지되지 않은 상황에 저란 존재가 훅 나타나서 언짢으셨던 것 같다. 당연한 반응이었고, 소란을 일으켜 죄송했다.”

-‘노태우 회고록’에 적힌 ‘광주 사태의 진범은 유언비어였다’는 문장을 수정하라고 요구하던데.

“아버지는 취임 전부터 5·18에 대한 생각을 여러 번 피력하셨다.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글이 있는데 거기에 ‘광주 시민의 민주화 의지가 6·29 선언의 어머니였다’고 말씀하신 게 나온다. 실제로 취임하자마자 민화위(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사태’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정정했고, 명예 회복과 보상도 시작하셨다. 그래서 문제의 대목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버지가 쓴 회고록을 자식이 고치는 게 맞느냐는 고민도 있다.”

-6·29 민주화선언이 있던 날을 기억하나.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감지했다. 아버지도 평소와 달리 비장하셨다. 마치 전장에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고 쓰실 땐 정말 숙연했다.”

-5·18에 대한 노재헌의 기억은 어떤 것인가.

“대학교에 붙은 5·18 관련 사진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너무나 비극적인 일인데 아버지가 관련돼 있다고 해서 번민이 많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따라 부르시나.

“물론이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신 것이 ‘무한 책임’이다. 본인이 관련 있든 없든 역사적·도의적 책임을 한 번도 회피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6·29 선언이나 민주화에 더 전력을 기울이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노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논란이 있었지만, 국론이 분열되는 걸 당신도 원치 않으셨고 국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어서 저희가 먼저 파주 통일동산을 제안했다. 교하 노씨이고, 아버지가 파주에서 사단장을 지낸 데다, 통일동산도 재임 시절 조성한 곳이라 인연이 깊었다. 국가장으로 치러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장례식에 박남선 5·18 시민군 상황실장이 왔더라.

“두 번째 참배하러 갔을 때 뵈었다. 정중히 사과드리자 흔쾌히 받아주시면서 아버지 돌아가시면 조문을 가겠다 약속했는데 그걸 지키시더라. 1주기에도 오셨다.”

-장례식 후 누나인 노소영 관장의 페이스북 글이 화제였다. ‘연희동 집은 동생에게 양보하고 나는 아버지가 덮으시던 곰돌이 담요를 가져왔다’는.

“누나가 욕심이 없다. 욕심이 없으니까 뭐 저러고 있겠지만(웃음). 저희가 딱 둘인데, 부모님이 가장 강조하신 게 우애였다. 우리가 죽더라도 너희 둘은 끝까지 사이 좋게 지내라고. 제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사회에서 많은 역할 할 수 있길 바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가 지난 5월 9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2023.5.9/뉴스1 ⓒ News1 김태성 기자

◇잊힌 ‘보통 사람들의 시대’

-‘노태우센터’가 지난 2월 출범했다. 재평가 작업을 본격화하는 건가.

“떠들썩하게 기념사업을 하는 건 아니다. 어느 젊은 유튜버가 노태우 정부가 꽤 많은 일을 했던데 왜 다 묻혀 있느냐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시간이 더 흘러 기억이 흩어지고 자료와 증언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방 정책, 88올림픽, 주택 200만호 공급, 범죄와 전쟁까지 업적이 많지만 ‘5.5 공화국’ ‘군정의 잔재’라는 평가도 받는다.

“엄청난 변혁과 혼란이 있던 과도기였다.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 과도기에 어떤 정책이 펼쳐졌고, 어떤 리더십이 발휘됐으며, 무엇이 성공했고 실패했는지 분석해 남기는 일은 중요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그때 던져진 경제민주화란 화두를 비롯해 남북문제까지 지금도 연결되고 반복되는 이슈들에 교훈을 얻고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7·7 선언’을 한 노 대통령이라면 현재의 꽉 막힌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갔을까.

“제가 아버지 묘소에 갈 때마다 빠짐없이 드리는 질문 중 하나다. 그때는 핵이 없었고 지금은 있으니 아버지의 답이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저는 핵의 유무보다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실향민이 다 돌아가신 뒤에도 통일 의지가 남아 있을까가 핵보다 더 큰 문제라고 본다.”

-경제 민주화, 재벌 개혁을 보수 정권인 노태우 정부에서 시도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분배와 성장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는 걸 아버지는 아셨다.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가는 차원에서 진보적 성격을 아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재벌개혁도 재벌이 미워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노동자와 중산층 모두를 만족하는 사회로 가려면 재벌을 일정 부분 견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약간의 혼란과 불협화음은 있었지만 분배와 성장을 균형 있게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태우 정부 때 가장 많은 노사분규가 일어났지만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았다더라.

“아버지는 공권력이 동원되면 다시 권위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갖고 계셨다. 또, 민주주의는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겪으면서 학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한 일 중 뭘 가장 자랑스러워했나.

“북방 외교 아닐까. 단순히 동구권 45국과 수교를 했다가 아니라 민족 자존, 자주 외교를 이뤘다는 점에서. 88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아 세계를 다녀보니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은 했지만 민주화는 안 된 독재국가라는 인식이 많았다더라. 그래서 민주화에 매진하셨고 그걸 자주 외교를 통해 보여줬다며 뿌듯해하셨다.”

-회고록에 자신의 최대 과오는 비자금 사건이라고 썼더라.

“그 시절 관행이었다고는 하나 모두가 아버지 자신의 과오라고 여기셨고, 국민께 가장 미안해하셨다.”

전직 대통령 아들 네 명이 지난 5월 10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65) EG 회장,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 김홍업(73)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64)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58)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김현철 이사장

◇ ‘물태우’에 동의하지 않아

-노태우 대통령과 마주 앉은 듯한 착각이 든다. 성격도 닮았나?

“둘 다 신중한 편이다. 아버지는 저보다 말씀을 훨씬 설득력 있게 하셨다.”

-김종인은 ‘노태우는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고 걱정하는 사람이었다’고 썼더라.

“신중하셨지만 한번 결정하면 단호히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강하셨다. ‘물태우’였다면 북방 정책을 비롯해 남북기본합의서, 주택 200만호 공급, 범죄와의 전쟁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노태우 대통령은 투병으로 20년 가까이 외부 활동을 거의 못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쉬신 적이 없다. 그래서 퇴임 후 좀 편히 사시길 바랐는데 한국적인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출소 후 병까지 얻고도 견뎌내시는 걸 보면서 참 잘 참는 분이구나 생각했다.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 덕분이다. 두 분의 애틋한 이야기는 어머니가 써오신 일기를 토대로 언젠가 꼭 알리고 싶다.”

-노 대통령 기일이 10월 26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더라.

“인연이 이래저래 많으시다. 가까이서 직접 모신 적도 있고. 따님이신 박근혜 대통령도 늘 애틋하게 여기셔서, 박 대통령이 정치 일선에 나오기 전 음으로 양으로 도와드린 걸로 알고 있다.”

-김대중 정치학교 4기 수강생이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김대중 대통령 얘기를 자주 하셨다. 정책적 협력도 많이 해주셨고, 꼼꼼한 데다, 본인 의사를 참 기분 좋게 전달하는 분이라고. 김 대통령도 남북기본합의서 등 아버지 때 정책을 계승해주셨다. 결석이 많았는데도 수료시켜줘서 감사할 뿐이다(웃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으로 한중일 우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더라.

“지난 봄에 한중일협력사무국(TCS)과 공동으로 세 나라 청년들을 5명씩 선발해 경주, 나라, 양주 세 도시를 다니며 문화 체험을 하고 교류했다. 서로 유사한 것, 다른 것을 보면서 삼국의 뿌리랄까, 아시아적 문화와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첨예한 정치 이슈들로 서로 싸울 땐 싸우더라도, 경제나 문화처럼 힘을 합쳐 융성한 시너지를 얻을 수 있는 분야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도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최근 행보가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좌절된 정치 활동 재개로 보는 시각이 있다.

“전혀 아니다. 그저 저같이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게 정치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능력이 부족하다. 뭣보다 얼굴이 두껍지 않고, 집요하지도 않고, 거짓말은 가끔 하는데 얼굴에 다 드러난다(웃음).”

-5·18 참배도 정치적 행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다. 제 진심이 더 중요하니까. 하하!”

7일 서울 청운동 동아시아문화센터에서 만난 노재헌 원장은 부친인 노태우 대통령의 외모를 빼닮았다. 그는 "육성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거의 처음"이라고 했다. 2023.7.7 이태경기자

☞노재헌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복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조지타운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장애인에게 음악의 길을 열어주는 ‘뷰티플 마인드’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으로 한·중·일 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있다. 현재 통일미래기획위원회 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