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진 국가안보실장. /뉴스1

북한과 러시아가 사실상 냉전 시대의 군사동맹 관계를 복원하는 조약을 체결한 이후 한·러의 공개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23일 “러시아가 고도의 정밀 무기를 북한에 준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 선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러시아가 북한에 첨단 무기를 제공하면, 우리 정부도 제한 없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북·러 간의 ‘위험한 거래’를 계기로 한·미 양측에서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포함한 다양한 핵 옵션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장 실장은 이날 KBS에 출연해 “우리가 밝힌 경고에 대해 러시아가 앞으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리의 무기 지원이 달라질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 후 한·러 관계를 복원하고 싶으면 러시아 측이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했다. 장 실장의 이번 발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최근 발언에 대한 반박이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 조약 직후 우리 측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 제공 등을 검토할 수 있다고 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의) 큰 실수가 될 것”이라며 “북한에 대한 초정밀 무기 공급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로의 발언을 반박·재반박하며 한·러 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장 실장은 한·러 관계에 대해 “우리 혼자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러시아도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최근 러시아의 동향은 조금씩 레드라인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했다.

북·러 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 체결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한국의 자체 핵무장 주장도 재점화되고 있다.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하고 있는 데다, 핵무기 대국인 러시아가 군사동맹 수준의 협력을 약속한 만큼 핵 균형을 위해 모든 수단을 다각도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전략연)은 23일 북·러 정상회담 이후 홈페이지에 게재한 ‘전략 보고서’에서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를 대놓고 무시하는 방식으로 북한 핵무장을 우회적으로 용인했다”며 “시간이 갈수록 북한의 핵보유국을 기정사실화하는 추세가 강화될 우려가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한미 확장 억제의 지속적 강화, 전술핵 재배치 및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식 핵 공유, 자체 핵무장 또는 잠재적 핵 능력 구비 등을 포함해 다양한 대안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검토 및 전략적 공론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핵우산에만 의지하기보다 독자 핵무장 등을 검토하거나, 당장 이것이 어려울 경우 ‘가능성’만이라도 열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잠재적 핵 능력 구비’는 한미 원자력 협정에 의해 제한받는 우라늄 농축과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보를 의미한다. 한국은 우라늄 연료 전량을 수입하고 있으며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의 경우 미국과 서면 합의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미국과 별도의 협의 절차 없이 우라늄 농축이 가능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한반도전략센터장은 “특히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에는 신속한 자체 핵 보유, 핵 개발이 가능하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전문가들은 특히 이번 조약에서 러시아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인정해 준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조약 제2조는 ‘전 지구적 전략적 안정과 새로운 국제 질서 수립 지향 및 전략 전술적 협동 강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략적 안정은 핵 보유 국가 간 핵 균형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조약 제10조엔 ‘평화적 원자력’ 분야 협력도 명시했다. 전략연은 보고서에서 “미국·인도의 원자력 협정(2008)에서 보듯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밖에서 핵무기를 개발한 국가와의 원자력 협력은 해당 국가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미국의 대북 확장 억제 제공만으로는 부족하다며 한국의 다른 핵 옵션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자유주의 성향 싱크탱크인 카토 연구소의 더그 밴도 선임 연구원은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에 실은 글에서 “한국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차악(次惡)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밴도 연구원은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한일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걱정하는데 한일의 독자 핵무장이 좋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도시들과 사람들을 계속해서 북한 (핵) 역량의 인질로 두는 것은 훨씬 나쁠 것”이라고 했다.

앨리슨 후커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21일(현지 시각)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웨비나에서 “우리는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으며 어쩌면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며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 심화가 확실히 한국을 그런 방향으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 의회에서도 이미 인도·태평양 지역 내 미국 핵무기 재배치 및 한미 핵 공유 협정 주장이 제기된 상태다. 최근 미 상원 군사위원회 공화당 간사인 로저 위커(미시시피) 의원은 상원 본회의에서 “동맹국인 한국, 일본, 호주와 핵 공유 협정을 논의해야 한다”면서 “이제 이 국가들도 앞으로 나아가 핵 공유에 동참해야 할 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