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국회의장이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퇴임식에 입장하고 있다./뉴시스

“21대 국회 후반기에는 야당의 법안 강행, 협상의 의지와 재량이 없는 여당, 거부권을 밥 먹듯 행사하는 정부라는 삼각편대로 사이좋게 공멸하는 일이 반복됐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왔는가’에서 “거부권의 정치, 비토의 정치, 마이너스의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며 “이런 정치 리더십 아래서 우리는 선진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의회주의자’로 평가받는 김 전 의장은 저서에서 ‘의회주의의 본령’에 대해 “열 가지를 주장하면 그 열 가지를 다 관철하려는 게 아니라 공통되는 대여섯 가지부터 먼저 처리하고 난 다음 하나하나 타협해나가는 것. 주어진 제약 조건 아래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의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약 2년간 14차례의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며 정치권이 공멸하는 상황에 대해 “가장 큰 원인은 극렬한 진영 갈등이고, 여야 모두 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첫 사례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당시 김 전 의장은 두 차례 중재안을 냈고, 첫번째 중재안이 야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김 전 의장은 자신이 중재안에 집착한 까닭에 대해 “무력화될 것이 뻔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야말로 의회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식으로 양곡관리법을 통과시키는 게 진정 농민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대통령의 거부권을 정쟁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었을까. 단언컨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며 민주당을 비판했다.

김 전 의장은 윤 대통령에 대해서는 “직접 만난 자연인 윤석열은 호방하고 깍듯하며 솔직한 이였다”라고 평가하면서도, “국회의장으로서 마주한 윤 대통령은 말 그대로 ‘비토의 정치’를 거듭했다”고 했다. 이어 “그의 고집이 완전히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태도와 자세와 형식이 너무 서툴고 투박하다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태원 참사 이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과 예산안 처리가 연계돼 국회가 경색됐던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김 전 의장은 윤 대통령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예산안 정기국회 내 처리를 위해 이상민 장관의 거취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내 말이 다 맞으나, 자신이 이태원 참사에 관해 지금 강한 의심이 가는 게 있어 아무래도 결정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그게 무엇인지 물었더니, 자신은 이 사고가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이상민 장관을 물러나게 한다면 그것은 억울한 일이라는 얘기를 이어갔다.”

김 전 의장은 “극우 유튜버의 방송에서 나오고 있는 음모론적인 말이 대통령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었다”며 “대통령이 잘못된 생각을 하면 참모들이 바로잡아 줘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이 논란이 되자 대통령실은 27일 “국회의장을 지내신 분이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해 나누었던 이야기를 멋대로 왜곡해서 세상에 알리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대통령은 당시 참사 수습 및 예방을 위한 관계 기관 회의가 열릴 때마다 언론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혹을 전부 조사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고 반박했다.

김 전 의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부 성공의 키워드는 ‘일관성’이라며, 윤석열 정부에 저출생 문제 해결을 주문했다. 그는 “현재의 출산율이 곧 우리의 젊은 세대가 이 나라에 매기는 점수와도 같다”며 “제대로 된 나라라면, 모든 국가의 모든 가용자원을 저출생 문제 해결에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0장, 130조로 끝나는 헌법의 마지막에 ‘지속가능한 인구정책’을 명문화하는 구상을 제시했다. ‘국가는 국민의 임신·출산 및 양육을 지원할 의무를 진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김 전 의장은 “윤석열 정권이 남은 3년의 임기 동안 저출생 해결의 토대를 닦고, 다음 정권이 이를 훌륭히 꽃피우고, 그렇게 우리 앞에 닥친 이 절체절명의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면 성공한 정권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회고록은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거쳐 21대 국회 후반기 입법부 수장을 역임한 김 전 의장이 50년의 공직 생활을 돌아보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부터 윤석열 정부까지 10명의 대통령 시기를 다뤘다. 김 전 의장은 지난 26일 출판기념회를 겸해 국가적 과제를 연구하는 기관인 ‘글로벌혁신연구원’ 개원식도 가졌다. 김 전 의장은 “후배들이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을 힘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저출생 대책과 사교육비 해결을 위한 공교육 혁신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로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1974년 행시 13회로 공직에 입문한 김 전 의장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내리 5선을 지냈다.

/김진표 전 의장 페이스북 김진표 전 국회의장이 26일 회고록 '대한민국은 무엇을 축적해왔는가'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개도국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을 추구한 사람

김 전 의장은 박정희 정부때 당시 상공부 산하 공업단지관리청에서 첫 공무원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새벽에 사무실 책상에 앉아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일일이 도표와 그래프를 그린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직보됐다. 내가 공무원으로서 처음 한 일”이라고 했다.

김 전 의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모든 부처를 다 직접 쉬지 않고 순시했고, 말단 공무원 개인에게까지 보고를 받았다”며 “철저한 ‘확인 사살’ 행정이자 군대식 신상필벌 조직관리였다”라고 술회했다.

김 전 의장은 “그는 결과적으로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며 “모든 주요사안을 대통령이 나서 일일이 책임으로써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결코 일회적이거나 전시적인 성격이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테크노크라트의 시대

1982년 전두환 정권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 금융사기 사건인 ‘이철희-장영자 사건’ 이후 김 전 의장은 비밀리에 추진된 금융실명제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집권 세력 내부의 격렬한 반발, 정치 자금 조성에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이유 등으로 좌절됐다.

김 전 의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악행을 인정하고 욕하면서도 ‘먹고 살기는 그때가 좋았다’는 말이 나온다”며 물가 안정화, 현재 대한민국 경제정책의 초석 마련 등이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김재익 경제수석, 강경식 장관 등을 거론하며 “1980년대 경제성장을 이끈 테크노크라트의 시대”라고 서술했다. 국민연금 도입

◇노태우 전 대통령: ‘보통 사람들’의 길

김 전 의장은 국회의장 시절 역대 의장 8명과 저녁 식사를 하며 언제 가장 의회정치가 만발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했는지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각론에선 의견이 갈렸지만, 역대 의장들은 각각의 출신 정당과 배경을 다 떠나서 김대중이라고 입을 모았다. (두번째를 물었을 때)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만장 일치로 꼽은 인물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김 전 의장은 “노태우 또한 자신이 저지른 죄과가 크고, 그와 그 가족들이 착복한 비자금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구시대적 행태였다”면서도 “그럼에도 그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을 나름으로는 발휘했다. 조금씩 ‘보통 사람들’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분명 군사정권의 태동에 기여한 군인 출신이지만, 감히 군사정권을 더 이어나갈 시도를 하지 않고 민주화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켰다.”

◇김영삼 전 대통령: 큰 승부의 리더십

김 전 의장은 김영삼 정부의 업적인 금융실명제 준비 핵심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진정 태생적인 대중 정치인”이라며 “단순하고 명쾌한, 큰 승부의 리더십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하나회 척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단행 등 굵직한 개혁으로 정치 기반을 확보했다. 김 전 의장은 “김영삼은 자신의 직관적인 의지와 판단의 힘을 믿었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때도 많았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삼당합당 과정에서 보수 세력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김영삼의 개혁에는 어딘가 미진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가장 특별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대통령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훌륭한 지도자’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했다.”

김 전 의장은 IMF 협상단과 ‘폭탄주 협상’으로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던 일,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기업개혁 등 4대 개혁을 추진한 일, 2002년 월드컵 대응팀장을 맡은 일 등을 등을 소상히 술회했다.

김 전 의장은 “그는 무엇이든 본인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완벽주의자적인 면이 있는 지도자”라며 “멀리 크게 보면서도 디테일한 것부터 꼼꼼하게 챙기고 깊이 숙고하는 스타일의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No)’라고 얘기할 수 있는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김 전 의장을 추천했다고 한다. 그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들어보고 맞다 싶으면 자기와 반대되는 생각도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반박해주는 걸 기꺼워하고 즐기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노무현 정권 초기에 “미국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은 “미국을 잘 알고 제대로 이용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 더없이 중요하다”며 “찰나의 분노에 따른 반대, 감정적인 비토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참여정부의 일원으로서 ‘기자실 대못 사건’ 등 언론 정책, 부동산 정책 등은 후회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2004년 경제부총리직을 맡고 있던 때 정동영 당시 당대표의 설득 등으로 총선에 출마했고, 17대 총선에서 당선돼 여의도에 발을 들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 철저한 실용주의자

“이명박은 이때까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스타일의 대통령이었다. 결국 국민이 선택한 것은 먹고사는 일이었다. 경제만 잘한다고 성공할 수 없지만, 경제를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친다는 게 모든 정권의 속성이다.”

김 전 의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정치적인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인물”이라며 “철저한 실용주의자, 실리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했기 때문에 정부가 원하는 정책이 있다면 무리하게 강행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며 “18대 국회는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장 직권상정이 가장 많이 남발됐다”고 했다.

이 시기 통합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김 전 의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안 처리를 이끌었다. 노무현 정부때 체결됐지만 당시 박지원·박영선·정동영 등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비준을 반대, FTA 협정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한 협상로 조정안도 만들어왔지만 의총에서 합의안이 거부당하고 ‘한나라당 2중대’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한미FTA 비준안 처리 당시 김선동 통합진보당 의원은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던졌고, 이 같은 ‘동물국회’에 대한 반성으로 국회 선진화법이 만들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제민주화와 탄핵

김 전 의장은 “박근혜는 우리에게 ‘이 나라의 지도자는 어떻게 선출되어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남겼다”고 했다. 박근혜 정권은 경제적으로는 경제민주화, 정치적으로는 탄핵이라는 큰 화두를 던졌다. 김 전 의장은 “탄핵 국면에서 헌법원리를 실현하는 성숙한 민주의식이 형성됐다”면서도 “직접 민주주의의 효능감이 권력에 대한 올바른 감시가 아니라 팬덤으로 옮아가고, 그 팬덤이 의회를 좌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피아 구분 정치가 패착

김 전 의장은 탄핵 이후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의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을 맡았다. 사실상 인수위원장 역할이었다. 그는 “국정자문위 활동 이후 많은 정책이 로드맵대로 시행되었으나, 보육과 교육 분야에 관해서는 지금도 아쉬움이 많다”고 평가했다. 또 원전 폐기 정책, 부동산 정책 등을 아쉬운 지점으로 꼽았다.

김 전 의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시 일부 극성 지지자들의 문자 폭탄 등의 행태를 ‘양념’이라고 말한 것을 꼬집으며 “각 진영의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활동은 중도층과 상식적인 지지자를 피로하게 하고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정치 공론장을 황폐화한다”고 했다. 이어 “문재인 정권은 여러 분야에서 잘한 점도 많았지만, 가장 큰 패착은 나와 적을 구별하는 정치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