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외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4

뉴욕포스트에 실린 수미 테리. 그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 뒤 뉴욕 시내 도로를 건너는 모습을 뉴욕포스트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뉴욕포스트 홈페이지

방문연구원으로 있는 조지타운대는 여름방학 중인데요. ‘호기심 안테나’를 펴지 않으려야 아니할 수 없는 일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벌어져 평소보다 눈과 귀를 더 많이 열고 다닌 지난 한 주였습니다.

바이든 대선 드롭 가능성(결국 지난 21일 포기 선언)이 커진 가운데, 트럼프 암살 시도 사건이 벌어졌고요. 한국 대통령이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가 워싱턴 D.C.에서 열렸는데, 그 다음주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한국계 미국인 수 미 테리(Sue Mi Terry)가 국가정보원(NIS)의 첩자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되는 일까지 터졌습니다. 그는 기소 다음날 체포됐는데 보석금 50만 달러(약 7억원)를 내고 현재 풀려난 상태입니다.

뉴욕포스트 홈페이지에 실린 수미 테리의 최근 모습. /뉴욕포스트 홈페이지

미국 뉴욕포스트 신문이 보석 직후 테리를 찾아가 마이크를 갖다대고 그가 황급히 택시를 잡는 모습을 찍는 등 미 언론에서도 이번 건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ABC, NBC, FOX뉴스, CNN 등도 여러 차례 이번 사건을 조명했습니다.

얼마 전 워싱턴 D.C. 근교 한인타운인 버지니아 애난데일의 미용실에 갔습니다. 한인분들이 수미 테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었습니다. 공소장에서 국정원 직원이 워싱턴 D.C. 명품샵에서 고가의 가방과 코트를 사주고 수미 테리가 받아 챙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다들 충격을 받고 실망한 듯했습니다.

괜히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지거나, 미 싱크탱크와 지한파 전문가들의 활동이 위축되진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CIA 분석관이 된 실향민 3세대·재미 교포 1.5세대

수미 테리의 대학원 졸업 사진. /독자 제공

수미 테리는 버지니아 페어팩스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CIA에서 퇴직하고 민간 대북 전문가로서 막 활동할 무렵 공개 행사에 나와 한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북한 정권과 통일 정책에 대해 한국어로 특별 강연을 한 곳도 버지니아였습니다.

테리는 현재 뉴욕 맨해튼에서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남편 맥스 부트(Max Boot)와 살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페어팩스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1972년 서울 태생인 수미 테리는 어린 시절 간암으로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1980년대 초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미 이민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10대 때 페어팩스로 넘어왔고, 뉴욕으로 대학을 갈 때까지 페어팩스에서 지냈습니다. 수미 테리는 재미 교포 1.5세대입니다.

그의 모친인 이은애 여사는 페어팩스 한인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여사는 지난 14일 애난데일 한인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린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 행사에도 참석했지요.

수미 테리는 실향민 3세대입니다. 외조부모가 이북 사람입니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이북 이야기를 듣고 컸다고 합니다. 그 영향에 북한과 통일에 뜻을 갖게 됐고, 미 터프츠 플레처 스쿨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CIA의 대북 분석관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테리가 이중 스파이? 가능성 제로(0)”

수미 테리가 워싱턴 주재 한국 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된 국정원 직원 2명(핸들러 1, 2)과 맨해튼 한 그리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 미 법무부는 공소장에 이같이 수사 중 비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미 연방검찰

공소장을 보면, FBI는 수미 테리의 인생을, 거친 표현을 빌리자면, 다 털어놓았습니다. ‘특정 관련자에 대한 배경(Background on certain relevant individual)’이란 항목에서 수미 테리의 태생 정보부터 이주한 이력, 그리고 그간의 직장 정보를 다 정리해놓았습니다.

수미 테리가 CIA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이유에 대해서도 “CIA 재직 중 국정원과 접촉한 것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라고 공개했습니다. 그가 이미 CIA 때부터 국정원과 부적절한 접촉이 있었다는 건 처음 알려진 사실입니다. 공직 생활을 무탈하게 마치고 민간 대북 전문가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해온 줄로만 다들 알고 있었지요.

CIA 재직 때부터 국정원과 ‘랑데부(만남)’를 가졌던 수미 테리가 퇴직 후에도 뉴욕 유엔 한국 대표부 및 워싱턴 D.C. 주재 한국 대사관의 국정원 직원들을 최소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약 10년간 반복적으로 만났습니다.

수미 테리의 이러한 수상한 행적을 정리해놓은 공소장의 초반부를 읽다 보면, 홍콩 영화 ‘무간도(無間道)’가 떠오릅니다. 영화에서는 경찰이 경찰학교 민완 생도를 불량배로 속여 몰래 삼합회 조직원으로 심어 1급 범죄 정보를 입수합니다. 삼합회도 똘똘한 조직원을 키워 경찰학교에 입학을 시킨 뒤 경찰 간부가 되게 해 경찰 내부 정보를 캡니다.

무간도와는 여러모로 다르긴 하지만, 수미 테리의 일부 이력을 보고, ‘수미 테리는 국정원이 CIA에 심은 A급 첩보원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소장 중반부로 넘어오면 그 상상을 접게 됩니다. 수미 테리를 만나 온 이른바 ‘핸들러(Handler·담당자)’라는 국정원 직원들이 한국 대사관 차량에 수미 테리를 태우는 등 거의 공개적이다시피 그와 만나 왔기 때문입니다. 이중 스파이라면 이런 식으로 접선하진 않았겠죠.

수미 테리가 핸들러와 같이 명품샵에서 사치품을 사고 나오는 행동도 전혀 이중 스파이답지 않습니다. 무간도를 보면, 삼합회 조직원으로 사는 비밀 경찰은 하고 싶은 것 못하고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못 먹고 개인 삶을 완전히 헌납하는 수준의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해 첩보 활동을 합니다. 사치품을 대가로 일하지 않지요.

수미 테리는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에 부주의했던 미국의 지한파 대북 전문가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국정원도 멀리 내다보고 동맹이라 할지라도 ‘아는 게 힘이다’라는 원칙을 실현하고자 인재를 키워 CIA에 ‘빨대’를 꽂았다가 들켰다기보다는 ‘뭐 별일 있겠어?’ ‘미국이 우리한테 딴죽 걸겠어?’라는 안일한 태도로 지한파를 활용하다 된통 당한 것 같습니다.

검거된 수미 테리가 ‘이중 스파이’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이번에 드러난 국정원의 실력을 보면 국정원에는 무간도 수준의 ‘이중 스파이’는 둔 것 같지는 않아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김정은의 최측근인 현송월이 국정원의 첩자이면 얼마나 요긴하겠습니까?

◆한미 양국에 다 보탬 될 수 있다…법 잘 알면

수미 테리가 워싱턴 D.C. 명품샵에서 고른 가방을 주미 대사관 소속 국정원 직원이 결제하는 모습. 미 정부는 보안 카메라로 촬영한 이 사진을 수미 테리 공소장에 게재했다. /미 연방검찰

이른바 DMV(워싱턴 DC, 메릴랜드, 버지니아)는 미국의 수도 지역이기 때문에 공무원 가족이 많이 삽니다. 펜타곤도 버지니아 알링턴에 있어 군인 가족도 버지니아에 많이 삽니다. CIA도 버지니아 랭리에 있지요.

국무부, 펜타곤, CIA, 법무부, 재무부 등 미 주요 기관에는 한국계 미국인 직원도 많습니다.

저는 수미 테리 사건 직후 미 정부 주요 부서에 근무하는 자녀를 둔 한인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메시지의 요지는 ‘수미 테리가 이번에 기소된 것은 FARA에 부주의했기 때문’이라며 ‘한국계 미국인의 활동이 제한될 이유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인들이 미국에도 100%, 한국에도 100% 기여하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러려면 법을 잘 알아야 하고, 또 그 법을 철저하게 잘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애초 이민자로 구성된 나라이고, 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국가 출신의 미국 시민이 미국을 보위하면서도 모국에 충성할 수 있는 길이 잘 마련되어 있다고도 강조했습니다.

공소장을 보면, FBI는 지난 10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미 테리에게 주의를 주면서 법적 절차를 준수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지요. 수미 테리가 FARA 절차만 충실히 지켰다면 이번처럼 체포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억울해하지 말고 법 재정비하자

21대 국회 의원들이 지난 2021년 11월 11일 국회 본청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조선일보 DB

수미 테리 같은 활동을 한국에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 한국인이 미국 정부를 위해서, 또는 일본 또는 중국의 국익을 위해서 칼럼을 쓰며 한국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 하고 그 대가로 특급 호텔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받고 에르메스 가방 선물을 받았다면?

이 한국인이 한국 외교부 또는 국정원 출신 전문가여서 한국 장관이 주재하는 비공개회의에 참석했다가 주요 내용을 한국 주재 외국 외교관을 몰래 만나 고스란히 전달해줬다면?

놀랍게도 이 전문가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활동을 처벌할 법규도 없거니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우리 정부 및 수사 기관이 추적 조사할 법적 근거도 빈약해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한국에 있는 외국 정보기관 요원과 외교관들은 직접, 또는 제삼자를 이용해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매수하고 한국 정부의 대외 정책 동향을 파악하며, 한국 언론 매체를 상대로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보를 주입하며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는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직 방첩 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외국 정부의 국익을 위해 한국 정부 관계자이나 정치인들을 만나 선물을 주고 정보를 주입하는 ‘전문가’ 탈을 쓴 사실상의 외국 로비스트들이 서울에만 수백명이 있다고 합니다.

몇 년전에는 유력 한국 정치인이 한 외국인 여성의 미인계에 넘어간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에 빠졌던 사실이 우연찮게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선 외국인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 제약없이 한국 국회의원에 접근해 식사를 하며 친분을 쌓거나, 우회적으로 정치후원금도 낼 수 있습니다. 법안의 문구 하나만 바뀌어도 특정 국가에 아주 유리해질 수 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외국의 로비에 무방비로 노출될 경우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국정원이 수미 테리와 ‘협업’한 방식은 대부분이 칼럼 게재, 연구소 미팅 조율로 FARA 절차를 안 지켰다 뿐이지 영화에서 나올법한 스파이 행위는 아닙니다. 문제는 한국에는 국가보안 관련 법이 부실해서 진짜 스파이 행위조차 제대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북한’에만 적용되는 이상한 간첩법

현재 ‘간첩법’에는 국가 기밀 정보를 ‘적(敵)’에 넘길 때만 형사처벌하게 돼 있습니다. 현행 형법 98조 1항은 ‘적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사형,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적국’은 ‘북한’으로 밖에 정해져 있지 않지요. 즉, 북한이 아닌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는 기밀을 넘겨도 처벌하기가 몹시 어려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놀랍지만 이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입니다. 한국 경찰이나 검찰, 국방부, 외교부를 비롯해 각종 개인 정보를 가진 지자체에서도 내부자들이 기밀을 외국 정부에 유출해도 개인정보법이나 기타 법으로 가까스로 처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형량이 무거운 간첩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 수사 및 방첩 기관은 낮은 단계의 법밖에 쓸 수 없기 때문에 기밀 유출 의심자가 있더라도 FBI가 수미 테리를 10년간 미행, 도청, 통신기록 조회 등의 방법으로 샅샅이 추적 감시 수사한 것 처럼 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 방망이로 첨단 장비를 쓰는 스파이의 행각을 포착해내야하는 것이죠.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한국은 외국 스파이 및 스파이 협조자가 활개치기 아주 좋은 무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수미 테리 사건과 관련해 “아니 미국은 왜 이런 걸로 이렇게 심하게 그러는 거야?”라고 억울해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보다는 최근 각국이 국가 보안법을 강화하는 추세를 고려해 우리나라도 미국에 버금가는 법규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간첩법도 ‘적국’에서 ‘외국’으로 법조문을 고쳐 한국 정부의 기밀이 다른 나라로, 다른 외국 기업으로 무분별하게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보안 허술한 한국에 중요 정보를 어떻게 나눠주나

국정원 원훈석.

미국이 한국 정부에 중국이나 북한에 대한 고급 정보를 공유하길 꺼리는 것도 한국은 보안 유지가 안 된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 기밀 관리의 이런 현실 때문에 역설적으로 미국은 한국 정부가 무엇을 하는지 손바닥 보듯 거의 다 알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서울의 CIA 직원이 한국 정부 관리에게 뭘 물어보면 이 관리는 별 경계심 없이 술술 다 말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고급 정보를 굳이 주지 않아도 한국 사정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기브 앤 테이크’ 식의 정보 거래를 한국과 특별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파라(FARA) 법의 기본 콘셉트는 카운터인텔리전스(Counter intelligence), 즉 방첩(防諜)입니다. K파라가 생기고 간첩법도 재정비하면 우리 기밀이 새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미국 등 동맹을 상대로도 보다 동등하고 탄력 있게 정보 교류를 할 수 있습니다. 방첩과 관련된 국내 법이 강화되고 그것이 체득화되면 자연스럽게 우리 정부 기관의 해외 정보활동의 수준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K파라법이 이미 있었다면 수미 테리 사건처럼 국정원이 미국 파라 법을 소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야(與野)는 수미 테리 사건을 놓고 ‘어느 정권의 잘못이네’ ‘네 탓인데 왜 남 탓이냐’며 삿대질을 합니다. 그럴 힘으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여야 의원이 모두 발의했는데도 수상한 몇몇 의원들 때문에(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처리되지 못한 ‘외국 간첩법’을 22대 국회에서 통과시켰으면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이번 수미 테리 사건을 계기로 얻는 뜻밖의 수확이 될지 모릅니다.

☞뉴스레터 ‘외설(外說)’은

미번역 외서(外書)를 읽고 소개하거나, 신문에 담지 못한 뉴스 뒷이야기[說] 등을 들려 드리는 조선일보의 뉴스레터입니다.

받아보시려면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4 로 들어가셔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시거나 제 이메일 stonebird@chosun.com에 여러분의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세요.

수미 테리 전 CIA 대북 분석관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썼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수미 테리는 박사 논문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분석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외설을 구독하시면 그 박사 논문 내용을 정리한 뉴스 레터를 외설 다음 편에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외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