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2년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으로 인해 불 붙은 옷을 벗어 던진 채 알몸으로 도망가는 소녀의 모습. /조선DB

‘네이팜탄 소녀’로 불리는 베트남계 캐나다인 판티 킴 푹(Phan Thi Kim Phuc)이 미국 마이애미주의 한 피부과에서 지난 6월 30일(현지 시각) 마지막 화상 후유증 치료를 마쳤대요. 킴 푹은 1972년 6월 8일 베트남 전쟁 중 전신의 65%에 달하는 부위에 큰 화상을 입고, 흉터 등 각종 후유증 치료를 받아왔다고 해요.

킴 푹이 화상을 입었던 당시는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참전한 상태였어요. 아홉 살이던 킴 푹이 살던 마을에 화학 무기인 ‘네이팜탄’(Napalm bomb)이 투하됐어요. 네이팜탄은 섭씨 3000도의 고열을 내며 반경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들고, 파편이 젤리처럼 사람 몸에 눌어붙어 치명상을 입히는 무기입니다.

팔에 불이 붙은 킴 푹은 너무 뜨거웠던 나머지 벌거벗은 채로 울면서 도로 위로 도망쳤어요. 그리고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가 이 모습을 촬영하며 베트남 전쟁의 실상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는 2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지역에 사용됐던 양보다 3배 가까이 되는 양의 무기가 사용됐는데, 이 중 상당수가 화학 살상 무기라고 해요. 왜 이 전쟁에서는 그토록 많은 무기가 사용됐던 걸까요?

◇제네바 회담으로 분단된 베트남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오랜 지배를 받았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는 이 지역을 일본이 점령했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망하자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 하려고 합니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대항해 1946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어요. 프랑스군이 1954년 5월 베트남 북서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서 호찌민(1890~1969)이 이끌던 북베트남 군대에 패배하며 끝을 맺지요.

그렇게 베트남의 독립은 눈앞에 온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변수가 있었습니다. 1954년 4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 회담이 열리고 있었는데요. 약 3개월간 열린 이 회담에서는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양분하기로 합니다. 기존 프랑스 세력이 강했던 베트남의 남쪽을 자유시장 체제로, 호찌민 세력이 강했던 북쪽을 공산주의 체제로 하고, 분단 후 2년 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거였죠.

그런데 2년 후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정부가 이 결정을 거부하고 남쪽에서만 선거를 치르며 1956년부터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간의 내전인 베트남 전쟁이 시작됩니다. 특히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남부해방군(일명 베트콩)은 남베트남에서 배후 지역을 소규모 무장 부대가 기습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쳤어요.

◇미국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확대

이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는데요. 처음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은 직접 개입하지 않고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했어요. 하지만 당시 미국에는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 진영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 전쟁에 개입할 뚜렷한 명분이 없었어요. 그러다 1964년 일명 ‘통킹만 사건’, 즉 미국의 정보 수집 함대가 베트남 근해의 통킹만 공해상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후에 미국 측의 자작극으로 밝혀졌어요. 우리나라도 이때 미국을 돕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전인 1961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게 “베트남에 개입하지 마라. 거기는 늪이다. 가봤자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드골의 말처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베트남의 우거진 밀림 지역에서 엄청난 곤욕을 치릅니다. 군인들은 말라리아나 이질(세균성 감염병) 같은 질병과도 싸워야 했지요. 여기에 더해 남부해방군은 밀림에 숨어 기습적으로 미군을 공격했어요. 이에 미국은 밀림을 밀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네이팜탄 사용하고 불도저로 숲 밀어

우거진 밀림 지형 때문에 미국은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하게 되는데요. 우선 숲으로 들어간 미군들은 남부해방군의 위치를 찾아내 알렸고, 신호를 받은 공군은 해당 위치에 폭격을 했어요. 이때 사용된 무기 중 하나가 네이팜탄입니다. 하지만 네이팜탄은 적뿐 아니라 정글 속에 있는 미군한테까지 피해를 줬지요. 이외에도 미군은 2.5t짜리 강철 칼날이 부착된 산림 벌채용 불도저로 매일 800ha(헥타르·1ha는 약 3000평)씩 숲을 밀어냈어요.

게다가 여러 화학 무기를 사용해 밀림의 나무들을 말라 비틀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미 공군은 1961~1971년 사이에 ‘랜치핸드’(ranch hand)라는 작전명으로 베트남에 제초제를 살포했는데, 제초제가 살포된 후 밀림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군인들 사이에서는 ‘고엽제(枯葉劑)’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무기는 적군의 은신처를 드러내고 공중 폭격 지점의 시야를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적군의 식량이 되는 농작물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에서 사용됐어요. 미국은 무려 2000만갤런(약 7570만8200L)의 고엽제를 비행기나 헬기로 10년 이상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 부었습니다.

고엽제는 ‘느린 탄환’이라고도 불립니다. 즉각적이진 않지만 인체에 서서히 각종 피부 질환, 위장 장애, 암 등의 질병을 유발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인체에 미치는 고엽제의 유해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고엽제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던 병사들은 공중에서 뿌려 대는 고엽제에 무방비로 노출됐어요. 오히려 당시 군인들은 이 고엽제가 비처럼 느껴져 시원하다며 계속 맞았다고 해요.

이때 베트남 인구 중 210만~480만명이 고엽제에 직접 노출된 것으로 추정되고, 베트남 전체 산림의 5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2만㎢ 면적의 녹지가 사라졌어요. 수천㎢의 논과 밭도 반영구적으로 훼손됐죠. 우리나라의 군인들 또한 약 4만명 이상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고요. 1970년이 돼서야 미 국무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 사용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의 밀림을 없애기 위해 이미 많은 양의 무기와 화학 무기가 사용됐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인간에게도, 환경에도 너무나 큰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 붓던 미국은 결국 1969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앞으로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1973년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며 휴전을 해요. 하지만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갈등은 계속되면서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1975년 결국 남베트남이 항복하며 비로소 베트남 전쟁은 완전히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