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543년 9월 23일 일본 권력자들은 대량살상을 너무나도 쉽게 가능케 하는 무기를 습득했다. 권력자는 권력을 더 강력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사무라이들은 유럽 중세 기사들처럼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그날 이후 위계질서로 정교하게 설계돼 있던 천하天下가 파괴되고 지구가 세계世界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천하를 고집하던 나라들은 이후 각도를 달리하며 흐르는 역사에 질질 끌려갔다. 그렇다면 바로 그 무렵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선을 스쳐간 철포
일본이 철포를 얻은 지 12년이 지난 1555년 5월 21일,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했다.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가지고 온 총통銃筒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 또한 맹렬합니다.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명종은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대마도 사람 평장친은 그때 동래에 와서 자기를 조선이 받아주면 총통 만드는 법을 전수하겠다고 했다. ‘조총’이라는 단어는 임진왜란 이후 생긴 말이니, 이 때 ‘총통’은 바로 철포를 뜻한다.
다음날 사간원이 재료에 관해 보고서를 올렸다.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다. 버려둔 큰 종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 남대문과 동대문 문루에는 만들어놓고 설치하지 않은 종이 뒹굴고 있었다. 뜻밖에도 명종은 거부했다. 바로 전날에는 왜인에게 벼슬을 주고 총통 제작을 허락했던 명종이 아닌가.
“이미 철재를 사들이도록 했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사간원이 “철재를 시장에서 사들이게 하니 원망과 한탄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해도 듣지 않았고, 비변사와 홍문관까지 철포 제작 허가를 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거듭된 재가 요청에 명종은 이렇게 답했다.
“어진 장수가 있어 잘 조치한다면 적들이 멋대로 날뛰지는 못할 일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말이다. 500년 전에도 지금도, 소위 ‘갑질’ 상사가 상투적으로 내놓는 대책이 바로 이 ‘열심히 하라’라는 대안이다. 그런데 본심은 따로 있었다.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스스로 억지임을 알았는지, 명종은 “이 말은 삭제함이 옳겠다”고 사관에게 일렀다. 사관 또한 어이가 없었는지 ‘삭제함이 옳겠다’는 말까지 실록에 기록해버렸다.
명종은 불교 신봉자였다. 문정왕후와 함께 왕실 사찰인 봉은사 주지 보우를 고문으로 두고 나라를 다스리던 임금이었다. 자기 신념 혹은 종교에 국가공동체의 안위를 양보한 것이다.
때는 한가하게 논쟁을 벌일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왜구가 호남을 침략해 영암,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쓴 전쟁 급 왜변, 을묘왜변이 벌어진 때였다.
1589년 7월 1일,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 경복궁을 방문해 선조에게 조총을 바쳤다.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 등이 조총 수삼 정을 바친 것이다.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이 ‘조총’이 열다섯 살 먹은 다네가시마 도주 토키다카가 현지화에 성공한 ‘철포’다.
그날 평의지, 그러니까 대마도주 소요시토시는 공작새 한 마리도 선물했다. 조선 정부는 공작새는 남쪽 바다 섬에 풀어주고 조총은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그 총으로 사격을 했고 분해를 했고 청소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단의 규모를 상세하게 기록했던 신경은 ‘재조번방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때 왜적의 사정은 전날과 달랐으나, 조정에서는 전혀 유의하지 않았다.’
3년 뒤인 1592년 임진년, 도요토미의 철포 부대가 조선을 짓밟았다. 동래 상륙 20일 만에 일본군은 수도 서울까지 진격했고, 선조는 의주로 도망갔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아들 히사토키도 참전했다. 전쟁 초기 조선 육군은 조총 소리에 혼비백산해 도주하기 급급했다. 조선의 은산은 죄다 무너지고 쇠로 만든 벽이란 벽은 죄다 뚫린 대참패의 연속이었다. 적이 제 손으로 신무기를 거듭 바쳤음에도 알아보지 못한 결과였다. 류성룡은 이렇게 기록했다.
‘한 달 사이에 도성을 잃고 팔방이 와해됐다. 실은 왜적이 조총이라는 좋은 병기를 가지고 수백 보 밖에까지 미치고, 맞히면 관통할 수 있고, 총알 날아오는 것이 마치 바람을 탄 우박과 같으니, 활과 화살은 감히 비교해 볼 수조차 없었다. 조선은 매양 “우리나라가 본래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다른 기술에 기대하겠는가”라고 하다가 참극을 맞았다.’
조선은 무기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었다. 화약도 만들고 화기도 만들어 왜구를 경계하는 그런 나라였다. 1479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때 ‘화약 장인을 동행시키면 이를 배워 노략질에 쓸 터이니 동행을 금한다’며 기술 유출을 경계했던 첨단 군사 국가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후 무기에 대해 무심했고, 그 사이 일본은 유럽으로부터 화약과 철포를 수입해 국산화에 성공하고 대량생산을 하고 무장을 했다.
◇세상을 보는 지도자들의 태도
전쟁 초기 조선 사령관이었던 신립은 충주에서 일본군 선봉부대 저지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일본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리 두려워했던 문경새재를 버리고 달천변 진흙탕에 배수진을 쳤다가 탄금대에서 투신자살했다. 본인은 물론 8000여 정예부대원이 몰살했다.
자살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탄금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탑이 서 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로 인해 조선이 상실한 병력, 조선이 덮어쓴 낭패감과 상실한 전의는 추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용장勇將일 수는 있어도 덕장이나 지장은 절대 될 수 없는 패전 사령관에 불과하다.
임진왜란 직전인 4월 초 신립이 류성룡을 찾아갔다. 류성룡이 그에게 물었다. “머지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의 생각은 어떠하오.” 신립은 대단히 가볍게 여겨,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류성룡이 되물었다. “그렇지 않소. 그전에는 왜적이 다만 칼과 창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장기長技까지도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자 신립이 대답했다.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
류성룡에 따르면, 신립은 ‘도무지 반성하거나 깨닫지 않고 가버렸다.’ 무장이 그러하건대, 문신들의 황당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조총을 만든 선조, 이를 비난한 사관
전쟁 와중인 1593년 11월 12일, 선조가 류성룡에게 명을 내렸다.
“조총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진하기가 쉽지 않다. 선線이 끊어지면 적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염려하다가 우연히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
선조는 이기적이긴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영민하기까지 했다. 그런 선조가 적으로부터 입수한 조총을 역설계해 총을 만든 것이다. 선조는 화승총이 가진 단점인 ‘장전에서 격발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사격과 장진을 교대로 하는 사격 시스템까지 고안해냈다. ‘돌려가며 다시 넣는다’는 말은 사격 소요 시간을 상쇄하기 위해 조총수가 교대를 하며 사격한다는 뜻이다. 1575년 6월 29일 일본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나가시노 전투 때 2열 횡대로 철포병을 배치하고 교대로 사격을 한 바로 그 사격술이었다. 이 엄청난 사건을 두고 실록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옛부터 중흥한 임금들은 영웅을 맞아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 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 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앞뒤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오늘날 급무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스럽다.’
무기 연구소 연구원들이 손 놓고 있는 작업을 최고지도자가 대신 해줬으니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도 모자랄 일인데, 사관은 ‘통탄스럽다’고 했다. 실록은 왕이 죽고 난 다음에 사초를 모아 엮는 책이다. 선조실록은 1610년 완성됐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이 등극하고 2년 만이다. 궁성도 불타버려 광해군이 창덕궁에 살며 나라를 재건하고 있던 때였다. 그 황량한 때에 실록을 쓴 사관은 저따위로 군주의 실용적 조치를 힐난했다. 바로 그 한심함이 군사강국을 나약함으로 몰아넣었다. 이순신과 의병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일본어를 쓰고 있지 않을까.
◇하늘로 간 공작새와 우주선
2010년 6월 13일 오후 11시 7분 일본 무인우주선 ‘하야부사’(송골매)가 호주 우메라 사막에 착륙했다. 발사 7년 만이었다. 하야부사는 소행성 이토카와 시료를 채취하러 발사됐다가 계기 고장이 연속되면서 우주 미아가 됐다. 세상 모두가 포기했지만,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JAXA는 그 7년 동안 원격 수리를 계속해 만신창이가 된 하야부사를 부활시켰다.
7년 만에, 세상이 포기했던 하야부사는 60억 킬로미터를 날아와 시료 캡슐을 사막에 떨어뜨리고 산화했다. 캄캄한 대기권에서 알을 낳듯 캡슐을 던지고 사라지는 하야부사 영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불사신처럼 일어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는 영화 속 사무라이를 떠올렸다.
그 하야부사를 발사한 JAXA의 발사기지가 있는 곳이 바로 열다섯 먹은 영주가 철포를 수입했던 작은 섬 다네가시마다. 1543년 맹렬하게 회전하는 지구에서 유럽과 일본이 연결된, 신문물이 동양에 상륙한 그 섬이다. 50년 뒤 그 철포와 함께 조선에 들어왔던 하얀 공작새는 지금 어디를 날고 있는 것인가. <다음 편에 계속> /선임기자(‘매국노고종’, ‘대한민국징비록’, ‘땅의 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