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스타트업]에서 발송한 콘텐츠입니다. 매주 화/목/금 레터를 발송하는 유료 멤버십입니다. 가입을 원하면 [클릭] 하세요. 네이버에선 이 링크입니다.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3087


2016년 겨울 윤석원(49) 대표는 자폐 청년 세 명의 멘토가 됐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이 발달장애인을 인턴으로 채용해 실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난리 났죠.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바닥에 눕고요. 발달장애인을 가르쳐본 적이 없었죠. 20분 수업하고 10분 쉬면서 수업했어요. 하지만 가능성을 봤죠. 집중력이 좋았습니다. 어떤 과목에선 놀랄 정도로 고득점을 땄어요. 반복적이면서 집중력이 요구되는 코딩 작업에서 잠재력이 있었습니다.” 윤 대표는 200시간 가량 자폐 청년들을 가르쳤다. 윤석원 대표가 테스트웍스를 창업한지 1년 남짓 지났을 때였다. 경력 단절 여성을 고용하는 직원 10명 안팎의 소셜임팩트 기업 창업자였다. 창업 전엔 마이크로소프트 엔지니어, 삼성전자 총괄 수석 연구원을 거친 꽤 이름을 날렸던 개발자였다.

교육 과정은 끝났고 피날래는 성과 발표의 날이었다. 글로벌기업의 한국 지사장과 사회공헌팀장, 멘토들이 모였다. 그리고 자폐아와 그들의 부모. 한 어머니가 마이크를 잡았다. “일주일 잠을 못 잤습니다. 아이들이 인턴이 됐을 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아이가 인턴이 됐을때 아 이렇게 정규직까지 될 수 있겠다. 혹시 그럴 수도. 그런데요, 인턴 한번 했다고 우리 아이의 미래가 달라질까요.” 누구를 향한 질문이었을까. 프로그램을 만든 사회공헌팀장이 답했다. 그는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사실은 이 인턴십, 안팎에서 반대 무척 많았습니다. 제가 우겨서 했습니다. 제가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 다섯살 아들도 자폐입니다. 여기 아이들의 현재 모습이 제 아들의 조금뒤 모습입니다. 그게 여기, 여기, 인턴까지요. 마음이 아픕니다. 아직 우리 사회와 기업은 우리 아이들을 받을 준비가....” 누군가 먼저 울었고 부모가 울었고, 그리고 청년들이 울기 시작했다.

청년의 눈물이 준 울림이라고하면 오버일지 모른다. 윤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요,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그들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데, 시간을 주신다면 이 친구들 채용하겠습니다.” 스타트업 테스트웍스는 그때가 피벗의 시작이었다. 이런 것도 피벗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테스트웍스 윤석원 대표. /테스트웍스 제공

◇인공지능 시대, 더티 워크를 하는 스타트업

테스트웍스는 발달장애인, 청각장애인 30여 명을 고용한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이다. 전체 직원(145명)의 4분의 1이다. 그들은 단순 업무 보조자가 아니다. 자율주행, 스마트물류, 글로벌 해운 관제 시스템 등 첨단 AI 소프트웨어의 데이터를 가공하는 핵심 업무를 맡는다.

내심 계획이 있었으니 발달장애인들을 채용했겠죠?

아뇨, 전혀 없었습니다. 그 일이 벌어진 날 저녁, 때마침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 스트라드비젼 김준환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율주행 비전 데이터를 정교하게 다듬어줄 작업을 의뢰하고 싶다고요. 자율주행차의 카메라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는 사람 손을 거칩니다. 아직 자율주행 AI는 도로 위의 사람, 자동차, 표지판 등을 100% 완벽하게 구분 못 합니다. 특히 초기 엔진은 정확도가 더 떨어졌어요. 예컨대 우리 회사 모 이사님이 탈모로 대머리입니다. 엔진이 이분을 사람으로 인식을 못 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어서요. 누군가는 AI에 ‘사람’을 구분해 지정해 학습시켜줘야 했죠. 왠지 그 일을 발달장애인 팀원들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 대표에게 전화로 ‘팀원들에게 장애가 있는데, 일을 맡겨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김 대표가 “품질만 좋으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그때부터 장애인들이 데이터 가공을 맡게 됐습니다.

AI를 위한 데이터 가공, 그게 뭘까요. ‘비정형 데이터’의 ‘정형화’라던데요.

정형 데이터 엑셀에 쫙 정리가 돼서 담긴 데이터입니다. 룰과 원칙이 있는 데이터요. 비정형 데이터는 아무 룰이 없는 데이터입니다. 스트라드비젼의 카메라로 찍은 도로 사진이 비정형데이터죠.

테스트웍스는 돼지 출산 모니터링 AI에 필요한 데이터를 가공해 납품합니다. 카메라 센서로 돼지우리에서 새끼 돼지만 감별하는 소프트웨어인데, 영상에서 새끼 돼지가 계속 움직이겠죠? 이걸 사람이 영상 속 아기 돼지에 표시를 합니다. ‘좌표 X축과 Y축, 어떤 벡터의 특정 물체가 새끼 돼지다’를 숫자로 AI에 알려주는 셈이죠. AI는 이 데이터를 받아 공부를 하고, 나중엔 혼자 새끼 돼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미지 라벨링, 데이터 라벨링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데이터라는 재료를 요리해서 AI에 밥과 반찬으로 만들어주는 일이요.

AI는 공부도 알아서 하는 것 아닌가요. 구글 알파고는 그냥 기보만 입력하니 알아서 최강자가 되던데요. 사람이 이런 노동까지 해야 하나요.

데이터 라벨링을 업계에선 ‘더티 워크(Dirty Work)’라고 합니다. 반복적이고 노동 집약적인, 근면성이 요구되는 작업이니까요.

한 팀원은 성인물 모자이크를 자동으로 하는 소프트웨어를 학습시킵니다. 오늘 아침 출근했더니 “대표님, 며칠 계속 야동만 봤더니 토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다른 팀원은 항구 사진 수백장에서 ‘배’만 누끼(포토샵에서 사물의 모양을 따라 이미지를 떼내는 작업)를 떴습니다. 그런 작업이죠.

그런데 한국은 더티 워크가 정말 필요한 시장입니다. 인공지능 개발 방식은 두가지입니다. 지도 방법과 비(非)지도 방법. 쉽게 말해 인공지능을 가르치느냐, 안 가르치느냐입니다. ‘이건 사람이야, 이건 아기 돼지야’라고 이렇게 데이터의 정답을 태깅해서 알려주는 것이 지도 방법입니다.

비지도 방법은 어마어마한 데이터 양이 필요합니다. AI가 알아서 정답을 찾아가려면, 그만큼 많은 오답을 알아야 하거든요. 구글처럼 손에 꼽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개인정보보호 없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중국만 가능한 방법입니다. 데이터 수집이 제한적인 한국 기업들은 지도 방식을 해야 하고, 그들에겐 더티 워크가 필수적이죠.

테스트웍스가 배를 '누끼' 따는 작업. 인공지능은 이런 바다 사진에서 배와 화물을 100% 완벽하게 구분해내지 못한다. 결국 사람이 배와 화물의 윤곽선을 따라 표시를 해주고,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AI가 학습을 한다. /테스트웍스 제공

테크 기업들의 페인 포인트를 해결해줬다?

AI 업계에서는 ‘데이터 수집과 가공이 끝났으면, 일의 70%는 끝난 셈’이라고도 합니다. 데이터 가공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일하는 방식이나 필요한 능력이 다른 AI 개발과 맥락이 좀 다르니까요. 디커플링한 전문 집단이 필요했고, 테스트웍스가 그 집단을 자처한 것이죠.

장애인이 만든 데이터라고 품질을 의심하는 고객사는 없었나요. 실제 품질은 어땠나요.

초기엔 제가 고객사에 불량을 사과하러 찾아 다녔습니다. 그때 회사에 경력단절 여성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분들께 장애인들이 작업한 데이터 검수 작업을 맡겼죠. 작업 절차를 쪼개고, 프로세스를 만들고, 일하는 가이드도 굉장히 촘촘하게 만들어 교육했고요.

이런 비슷한 일을 하는 미국 기업들도 몇몇 있어서 찾아갔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우선순위. 첫째가 퀄리티, 둘째가 가격 경쟁력, 셋째가 소셜 밸류 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한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죠.한 창업가가 그러더군요. “우리는 인도, 베트남 데이터 아웃소싱과 싸우고 있다. 그들을 이기려면 퀄리티 뿐이다”고요. 미국 회사들 매뉴얼을 기반으로 작업 매뉴얼을 만들었고, 지금은 퀄리티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는 프로세스가 체계화됐습니다. 대부분 고객이 재구매를 하니까, 어느 정도 품질을 인정받았다고 자부합니다.

◇탈북 청년이 던진 울림

혹시 가족, 지인 중에 장애인이 있나요. 가까운 곳서 장애인의 어려움을 지켜보다 창업을 결심했다든지요.

아뇨. 가족도, 주변에 장애인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살면서 갖고 있던 의문이나 느낀 것들이 사업이 된 것 같은 느낌적 느낌입니다. 제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많고, 제가 준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요.

MS 다닐 때, 사회공헌파트와 연계해서 탈북청년 멘토링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이 친구에게 제가 소프트웨어 교육을 했죠.

그거 아시나요? 탈북 청년들의 대학 휴학 비율이 장애인보다 높습니다. 적응을 못 해서요. 한국의 학생 문화, 교육 방식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을 안 씁니다. 이 친구를 열심히 교육해 본사로부터 인턴 1년 채용 허가를 받았습니다. 어느 순간 영어가 일취월장하고, 6개월이 지나니 업무를 곧잘 하더군요. 인턴 마치고 엔지니어로 대기업에 취업했습니다.

한국에 적응 못하는 탈북 청년들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그들에게 붙인 레이블(Label, 상표)요. 분명히 그들은 어떤 잠재력이 있는 인간인데도, 우리가 ‘안 될 거야, 어려울 거야’라고 선을 딱 그어놓았잖아요. 그 차별의 벽을 넘기가 어려웠던 것이고요.

이후에도 탈북자 친구 몇몇을 그냥 1~2달에 한 번씩 집에 불러서 밥 먹었어요. 지금도 가끔 만나는 친구들이 6명쯤 됩니다. 저의 작은 노력만으로도 이 친구들의 잠재력을 살려줄 수 있다는 걸 알았죠.

MS에서 삼성전자로 스카우트 돼서 갔다면서요.

2014년 삼성전자로 갔습니다. AP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엔지니어였죠. 세부 분야는 저전력 프로세서와 서버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만에 퇴사를 했고요.

2015년 가을쯤이었나요. 출근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어떤 괴리감 같은 것요.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와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일치해야 직장 생활이 즐거울 텐데, 간극이 점점 더 커지더군요. 회사는 개발 완성도, 작업 수행량, 매출, 성과를 측정하죠. 그런데 제 머릿속에선 ‘탈북자를 엔지니어로 쓰면 어떨까, 우리 팀에서 장애인이 일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만 드는 거예요.

수원 사업장에 통근 버스 내리자마자 정문 통과 안 하고 사업장 외곽을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걷다가 결심했죠.

‘아, 사표 써야겠다.’

그날 날씨가 정말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스타트업/ 테스트웍스 /개요

장애인 고용 전에는 경력단절여성들과 일을 함께 했습니다.

회사에서 대안으로 육아휴직을 제시했습니다. 육아는 안 했고, 여성 인력 센터에 나가서 교육했습니다. 10년 이상 경력 단절된 여성들이 단순 노동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생각으로요. 그분들께 IT 교육을 했고, 그분들과 함께 소프트웨어 테스팅을 시작했죠. 경력단절여성 세 분을 채용했어요.

짧은 교육만으로 직무 수행이 가능했나요.

가스 소프트웨어 테스팅이었습니다. 가스 공장에 가면 무수히 많은 밸브가 있고, 소프트웨어가 가스 관리를 하고, 밸브 누출 여부를 스스로 검사해 체크합니다. 이 소프트웨어 정확도와 이상 유무를 사람이 체크하죠. 이 작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꼼꼼함과 책임감. 이 둘입니다. 지시사항과 체크 순서를 정확하게 숙지하고, 정해진 시간과 동선대로 소프트웨어 작동 유무를 체크하는 것. 세 분이 거의 완벽하게 해냈어요. 지금도 경력단절여성들이 소프트웨어 테스팅을 합니다.

40대 창업이 20대 창업보다 더 어려워 보이더군요. 가족들 반대는 없었습니까.

진짜 회사를 그만두니 애들이 울더군요. 당시 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작은 아이가 3학년이었습니다. 큰 애가 “아빠, 우리 집에 이제 빨간(압류) 딱지 붙는 거야?”라던데요. 아내는 아주 심플한 원칙을 말했습니다. “응, 지금 벌던 만큼만 가져와”라고요. 속으로 ‘큰일났다’ 했죠.

스타트업/ 테스트웍스 /연도별 직원 수

◇장애인 퇴사율 0%, 3년 동안 투자를 모두 거절한 이유

지금 테스트웍스에서 일하는 장애인이 몇 명쯤 됩니까

발달장애인이 30여명, 청각장애인 10여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인턴이나 수습생들이 그만두고 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숫자는 그때그때 달라요.정규직으로 이야기하자면 작년 말, 장애인 정규직이 19명이었고요, 올해는 정규직 6명이 더 늘었습니다. 일용직 다섯과 실습생 하나를 정규직으로 전환했어요.사실 중간에 그만 두거나 교육 단계에서 포기하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저와 실무자가 가능성이 없는 친구들을 과감하게 커트하기도 하고요.

장애인 팀원들 임금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업무와 직급에 따라 차이가 있어요. 최저임금보다 약간 많은 수준 팀원도 있고, 한 달에 300만원 정도 받는 파트장 직급도 있습니다.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직무를 바꿀 기회를 주고요.

정규직 장애인 퇴사율 0%. 그만큼 고용이 경직된 것 아닐까요. 실제 투자도 거의 못 받으셨던데요.

투자는 ‘안’ 받은 것입니다. BEP(손익분기점)가 맞았으니까요. 매출이 많이 난 것이 아니라, 돈을 아껴서 적자가 안 났죠. 초기 창업 자본금이 5000만원이었습니다. 재건축 아파트 상가 월세 40만원짜리 사무실을 썼습니다. 그것도 돈을 아끼기 위해서 저녁에는 후배가 학원으로 쓰고, 낮에 제가 사무실로 썼죠. 직원 급여 주기 위해 제가 컨설팅, 강연 뛰고 급여 주고 그렇게 첫 3년을 버텼습니다.

VC는 그들 제안이 싫어서 거절했습니다. ‘지금 회사와 별개로 기술 회사를 만드세요. 그러면 그 회사에는 투자하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저를 비롯한 핵심 팀원의 개발능력만 인정해주겠다고요. 그 이야기는 곧 장애인과 여성을 두고 떠나라는 말이었습니다. 다 거절했습니다. 초기 3년을 투자, 대출 다 안 받았습니다. 팀의 목표와 비전을 알아주지 못하는 돈을 굳이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스타트업/ 테스트웍스 /투자유치

목표와 비전이 ‘훌륭한 AI 개발’ 아니고요?

테스트웍스의 시작은 그냥 임팩트 스타트업입니다. 훌륭한 사업을 하다 보니 소셜 임팩트,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 회사가 아닙니다. 정말 임팩트 그 자체를 위해 만들어진 회사였습니다. 목표와 비전이 ‘포용적 고용’이었으니까요. 창업자 제 고민이고요. 그런데 제가 엔지니어, 기술자 출신이니까 회사에 하나 둘 기술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이제 기술 회사로 전환하는 단계고요.

작년 60억원 투자는 연구개발을 위해 받았습니다. 데이터 라벨링에 필요한 인공지능 모델을 만들고 있어요. 저희가 더티 워크를 한다고 해서 정말 손으로만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데이터를 가공, 정리, 전송하고 모니터링하는 내부 솔루션이 있는데 이 솔루션을 고도화할 겁니다.

데이터 퀄리티 싸움이 정말 치열해졌거든요. 거의 모든 분야 AI 정확도는 이제 80%까지 올라왔습니다. 여기서부터 1%, 0.1% 정확도를 위한 싸움입니다. 자율주행은 정확도가 99.999%가 돼야 완전 상용화가 가능하죠. 0.1% 업그레이드에 퀄리티 높은 데이터가 필요하고, 이걸 계속 만들어내는 일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부칩니다.

그래서 투자를 받아 개발자 여럿을 채용했고, 이들이 AI 엔진을 개발 중이죠. 이 시장은 빠른 속도로 크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저희처럼 데이터 라벨링을 전문적으로 하는 ‘스케일AI’의 기업가치가 7조원을 넘으니까요.

장애인을 고용하면 도우미, 관리인력도 같이 늘어날텐데요. 비용 걱정은 안 하시나요.

IR 때 자주 듣죠. ‘장애인 많이 고용할수록 도우미 써야 하지 않나요, 매출 늘어날수록 비용이 계속 증가하는 비즈니스 아닌가요’ HR 관점에서 가장 큰 비용은 직원이 갑작스럽게 나가고, 그 자리에 인력을 데려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저희는 아무도 회사를 나가질 않습니다.

장애 팀원들은 얼굴에 다 드러나요. 피곤하면 피곤, 불만이면 불만, 업무가 어려우면 어렵다는 난색까지요. 제 직장인 시절을 생각해보면 전날 술 먹고 다음날 반나절을 그냥 모니터만 쳐다보다 보내고, 상사 욕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은 적도 많습니다. 장애 팀원들은 그런 것이 없이 솔직하고 업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젠 장애인 팀원들과 일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도 해요.

['수어 영상 AI 데이터'를 활용한 배리어 프리 시범 서비스 사례 영상]

◇20년 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아시안 개발자, 폐업 당일까지 일한 사연

신문방송학과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전과하셨습니다. 문과에서 이과로 갈아타셨군요.

언론학 교수하려고 유학 갔어요. 우연히 컴퓨터 사이언스 수업을 듣는데 교수가 저보고 재능이 있대요. 컴퓨터 공학 교수가 ‘왜 교수하고 싶으냐’고 묻더군요. ‘세이프(safe)’, 안정적이어서라고 대답했죠. 교수가 프로그래머가 그보다 더 안정적인 직업이니까 전공을 바꾸래요.

그러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는데, 문과생 잘하는 것이 ‘암기’ 아닙니까. 한번은 교수가 답지 보더니 ‘치팅(cheating)’이라기에 외운 걸 칠판에 다 썼죠. 그랬더니 교수가 조교를 시켰어요. 90년대말 졸업하고 2003년까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서 일했죠.

20년전 실리콘밸리의 아시안 개발자라. 흔치 않은 경험이군요.

제가 실리콘밸리는 ‘정말 fair(공평)한 곳’이었습니다. 기회와 보상 모두요. 저와 경쟁했던 입사 지원자가 스탠포드, 버클리 공대 애들이었습니다. 당시 창업자가 절 안 자르더군요. 제가 어느 정도 영어를 못했냐면, ‘How are you?’라고 안부를 물으면 ‘good(좋아)’이 아니라 ‘yes’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도 3~6개월마다 월급을 계속 올려줬고, 점점 중요한 일을 시켰어요. 정말 성과 중심으로 평가하는 문화였죠. 결국 망하기 직전, 최후의 3인까지 남아서 폐업 신고 날까지 일했죠.

IT 버블이 꺼지던 시기였을텐데요. 그 살벌한 곳에서 살아남았군요.

나중에 창업자에게 물어봤어요. ‘왜 날 뽑았고, 왜 날 해고하지 않았느냐’고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넌 싸고(cheap) 좋은 팀원이었으니까. 난 너의 학교도 신경쓰지 않고, 너의 인종도 신경 쓰지 않아. 애티튜드가 좋았고, 일을 열심히 했으니까.”

아, 그때 개발했던 소프트웨어는 지금 세일즈포스의 할아버지 버전이랄까요. 그때 팀원 대부분이 지금 세일즈포스에서 일해요.

지금 생각났네요. 그때 창업자가 헤어지는 날, “넌 언젠간 창업할 것 같다”고 했어요. 진짜 하게 됐네요. 그나저나, 대표가 이렇게 힘든 일인가요. 제가 속해 있던 회사는 항상 갑이었고, 전 엔지니어여서 을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스타트업 대표는 회사의 모든 기능(function)을 다 해야 한다니까요. 이렇게 어려운 일이면 진작에 이야기 좀 해주지!

<Epilogue>

윤석원 대표를 만나고 장애인들이 일하는 사무실로 가봤습니다. 점심시간이었는데, 라면을 먹으면서 일하는 직원도 보였습니다. 자리에서 PC게임을 하는 직원들도 보였고요. 한쪽에선 다섯 분이 윈도 메모장에 글씨를 써서 필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는지 깔깔거리고 웃더군요. 저렇게 대화를 하는 이유를 묻자 안내를 도와준 다른 팀원이 설명해줍니다.

“아, 청각 장애 팀원들은 대화를 나눌 때 다른 팀원들 입모양을 보고 글씨를 읽어요. 그런데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니까 입모양을 못 읽게 됐어요. 그러니까 메모장으로 문장을 쳐서 대화를 나눠요.”

조금더 알았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여전히 좁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