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멧돼지가 우르르 어디론가 이동 중입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멧돼지의 입에는 흰 물방울 무늬가 선명한 사슴 새끼가 축 늘어진채 매달려있습니다. 아기사슴 밤비의 주인공이죠. 어쩌다 곰도 늑대도 아닌 돼지의 사냥감이 됐을까요. 이 돼지는 정말 살아있는 사슴을 덮쳐서 물어죽인 것일까요? 이 작은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 가족들과 나눠먹을까요? 미 미시간주립대 저널리즘대학 학내뉴스코너에 작년 말 올라온 이 사진은, 구체적인 스토리를 떠나서 야수로서의 돼지의 섬뜩한 본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군을 자부하던 미군도 한국 멧돼지를 잔뜩 경계하나 봅니다. 주한미군이 최근 경기도 북부 기지를 통해 멧돼지 안내문을 발표했습니다. 소요산과 감악산 등 경기북부 산에서 등산을 할 때 멧돼지와 마주쳤을 때 행동요령을 안내했습니다. 11월부터 2월까지는 잔뜩 예민해져있는 짝짓기 시즌이니 각별히 유의하고, 새끼들과 있는 가족은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절대로 등을 보여서도 안되고, 겁이 난다고 소리를 질러서도 안된다고도 경고합니다. 호랑이도 곰도 사라진 한반도 산하에서 왕노릇 하는게 멧돼지라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지만, 미군이 이처럼 멧돼지를 의식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야생의 돼지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신종 맹수’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중이거든요. 워낙 국토가 광활하고 회색곰, 퓨마 등 토종 맹수들의 위용으로 이름나다보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자연보호당국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야생 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미국 입장에서 외래종이거든요. 미국에서는 야생 돼지를 떠돌이 돼지(Feral Swine)라고 부릅니다. Feral은 ‘떠돌아다니는’, ‘막 살아가는’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도둑고양이라고 부를 때 ‘도둑’의 의미지요. Swine은 무리로서의 돼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특정 동물의 종류가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돼지 종류를 통틀어서 떠돌이 돼지(Feral Swine)라고 부르지요.
본디 멧돼지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토종 멧돼지를 비롯해 몇 주 전에 소개해드렸던 인도네시아 특산종 바비루사, ‘라이온킹’의 품바로 알려진 아프리카 특산종 혹멧돼지 등이 다 멧돼지의 무리이죠.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은 애당초 멧돼지와는 상관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미주 대륙 도착을 기점으로 초창기 유럽 탐험가들이 15세기부터 식량용으로 가축 돼지를 들여갔는데, 이 중 일부가 울타리를 넘어서 야생에 ‘정착’합니다. 유럽 사람이 원주민이 살던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것처럼요. 이때까지는 커다란 생태계의 위협은 안됐던 것 같아요. 본격적인 문제는 100여 년 전부터 불거집니다. 20세기 들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레저의 개념이 확립되면서 스포츠 사냥을 위해 유라시아 멧돼지와 러시아 멧돼지를 대량으로 들여옵니다. 이 중 일부가 미국의 산하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베이컨과 소시지가 될 운명을 피해 농장을 탈출한 가축돼지들도 선조들처럼 야생돼지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짝을 지으며 하이브리드종이 탄생했습니다. 순종과 혼종이 버무려져 폭발적인 번식력을 과시하며 떠돌이 돼지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죠.
멧돼지가 놀라운 이유는 이들이 소·낙타·하마·기린과 같은 우제류라는 점입니다. 다른 우제류 무리들이 생김새와 덩치는 제각각일지언정 오롯한 초식동물로서의 식성은 일관되게 유지하는데 비해 멧돼지는 식성의 폭을 고기까지 넓혔죠. 이런 먹성의 진화는 미국 토종 생태계에 악몽이 됐습니다. 미국에서는 떠돌이 돼지를 ‘네 발 달린 재앙’이라고도 해요. 지난 핼러윈 시즌을 맞아서 핼러윈 괴물로 표기한 포스터까지 등장시키며 경각심을 고취했죠. ‘괴물’로서의 면모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먼저, 폭발적이면서 파괴적인 먹성입니다.
이들이 나무와 풀뿌리 열매 등을 닥치는대로 파먹으면서 미국 토종 야생동물인 사슴, 흑곰, 야생칠면조 등이 굶주리는 지경이 됐습니다. 무리지어 숲을 뛰어다니면서 길바닥에 둥지를 트는 새들의 알이 채 부화도 되지 못하고 깨지면서 번식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지요. 초식동물에 그치지 않고 포식자의 면모도 과시합니다. 뱀과 도롱뇽은 국수가락 넘기듯 후루룩 한 입거리로 넘겨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동물들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것으로도 조사됐습니다. 떠돌이 돼지의 몸을 통해 가축과 반려동물, 사냥개로 각종 감염병과 기생충이 전이되는 것이죠. 이쯤되면 미국 자연보호 당국자들에게 떠돌이 돼지의 존재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순결하고 순수한 악의 화신 볼드모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번식력도 폭발적입니다. 버지니아주 자연보호국은 “14~16개월이 지나면 한 무리의 숫자가 세 배로 불어난다”며 “숫자를 안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해마다 무리의 70%를 제거해야 한다”는 우울한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현재 미국 본토 48개 주 중 35개 주에서 떠돌이 돼지의 출현이 보고 됐습니다.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텍사스·플로리다를 비롯해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선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서북쪽 끝 워싱턴에서도 모습을 나타냈어요. 다만 회색곰이나 퓨마 등이 많이 사는 몬태나·와이오밍·아이다호 등까지는 세력을 뻗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을 훼손한 인간에 복수의 화신으로 나타난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또다른 진화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 짐승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유능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미국 농무부와 각 주 자연보호국은 조직적으로 떠돌이 돼지 퇴치를 위한 조직을 꾸리고 운영 중입니다. 하지만, 적응력과 생존의 본능이라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는 이들을 따라잡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도 멧돼지는 원래 위대한 대자연의 신이었지만, 인간과의 대결 과정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살아도 한낱 미물로 쪼그라든 존재처럼 그려지죠. 멧돼지의 계절이 시작됐습니다. 우리도 등산길에서 언제 마주칠지 모르니, 머릿 속에 행동요령은 숙지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