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이 가게 안쪽 벽에 붙은 좁고 긴 바(bar)에 기대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 커피를 홀짝입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이는 없습니다. 주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예 메뉴에 아메리카노가 없습니다. “아메리카노가 없어서 쏘리(sorry), 앉을 자리가 없어서 쏘리예요.” 서울 적선동 ‘쏘리 에스프레소 바’ 직원은 가게 이름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하며 웃더군요.
‘노(no) 좌석, 노 아메리카노.’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에스프레소 바(espresso bar)의 공통점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미국식으로 변질된 커피가 아닌 정통 이탈리아식 커피문화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카페가 아니라 바(bar)입니다. 커피 전문가를 뜻하는 바리스타(barista)는 원래 이탈리아말로 ‘바에서 일하는 사람’, 즉 바텐더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개 바에 서서 커피를 마십니다. 설탕을 한두 스푼 넣고 휘휘 저어 입에 털어 넣고는 바로 나가죠. 한국이나 미국처럼 좌석이 많고 널찍한 커피점을 찾기 힘든 이유입니다. 아메리카노는 팔지 않습니다. 미국과 아시아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내 에스프레소 바는 이탈리아에서도 커피 사랑이 유난한 나폴리식(式) 커피 문화를 기반으로 합니다. 나폴리는 어떤 다른 이탈리아 지역보다 커피를 사랑하고 많이 마십니다. 여기서 커피란 당연히 에스프레소지요. 그것도 진하고 농축된 에스프레소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리스트레토(ristretto)’라고 해서 적고 진하게 뽑은 에스프레소를 나폴리에선 ‘카페 노르말레(caffe normale)’ 즉 일반적인 에스프레소로 칩니다.
나폴리식 에스프레소 바가 국내 확산된 건 4년쯤 전부터입니다. 지난 2017년 문 연 ‘리사르커피’는 에스프레소 바를 국내 처음 소개한 곳으로 꼽힙니다. 서울 약수시장에 있는 첫 매장에 이어 얼마 전 청담동에 2호첨을 낸 이민섭 대표는 “바리스타로 일하던 중 (제가 쓴) 조선일보 프란체스코 일리 인터뷰 기사를 보고 나폴리로 가서 커피를 배우고 왔다”고 하더군요. 어찌나 반갑던지요.
이 대표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매장 형태를 고민하다 보니 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더라”고 말했습니다. “에스프레소는 뽑아서 바로 마셔야 풍부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즉석식품’입니다. 바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뽑자마자 바로 팔을 뻗어 손님에게 드릴 수 있어요. 이탈리아 커피점 대부분이 바 형태인 이유죠.”
◇세계 최고의 커피 도시, 나폴리
그렇다면 나폴리식 커피 문화는 무엇일까요. 10년 전 이탈리아 연수 시절 나폴리에서 반드시 지내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커피입니다. 이탈리아 최고 커피원두업체 중 하나인 일리(Illy) 대표 프란체스코 일리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를 인터뷰하면서 “전 세계를 다니며 커피를 마셔볼 텐데, 어디 커피가 최고냐”고 물었죠. 그는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나폴리”라고 답했습니다.
“나폴리 사람들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커피를 많이 마십니다. 그래서 커피 맛을 너무나 잘 알죠. 솜씨 좋은 바리스타를 스타로 떠받듭니다. 반자동 에스프레소 머신만 사용합니다. 반자동 머신은 커피를 뽑는 바리스타 솜씨가 좋으면 자동 머신보다 훨씬 맛있는 커피를 뽑을 수 있어요. 하지만 바리스타가 형편 없으면 최악의 커피가 추출되지요.”
일리가 한 말이 잊히지 않았고, 나폴리에 도착하자마자 카페에 갔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모든 가게에서는 반자동 머신을 사용하더군요. 자동은 커피 원두 가루를 끼워 넣고 버튼만 누르면 커피가 추출되는 기계입니다. 국내 커피점에서 사용하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거의 모두 자동입니다.
반자동은 자동이 개발되기 전 단계의 머신으로, 길쭉한 막대 모양 레버가 달려 있습니다. 레버를 아래로 당기고 버튼을 누르면 레버가 천천히 원위치로 올라가면서 에스프레소 커피가 추출되지요. 이때 바리스타가 레버를 붙잡아 올라가지 못하게 하거나 올라가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날의 습도나 기압, 손님의 취향에 따라 커피 맛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바리스타는 탄산수 한 잔을 먼저 내놓았습니다. 입을 헹구고 커피를 마시란 배려. 이어 바리스타는 “설탕을 넣느냐”고 묻더군요. “넣는다”고 하자, 바리스타는 설탕 한 스푼을 잔에 털어넣더니 에스프레소 머신 밑에 놓고 커피를 추춘하기 시작했습니다. 설탕을 넣고 안 넣고에 따라 커피 맛과 추출액을 달리하는 듯했습니다. 밀라노·피렌체·로마에는 없는, 이탈리아에서도 오직 나폴리에서만 볼 수 있는 커피문화입니다.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줬습니다. 짙고 두꺼운 황금빛 크레마에 덮인 커피에서 참기름처럼 고소한 향이 올라왔습니다. 나폴리 사람들이 하듯 커피를 한 모금에 입에 털어넣었습니다. 쌉쌀하면서도 과일처럼 산뜻한 산미가 조화로웠습니다. 이어 고소한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습니다.
평생 마셔본 최고의 커피였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한 잔 더 주문했습니다. 이번엔 설탕을 넣지 말아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커피 자체의 단맛이 충분해 굳이 설탕을 넣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렴한 가격과 유럽 감성
4년 전 리사르커피가 처음 문 열 때만 해도 외국처럼 커피를 서서 마시는 문화가 보편화될 수 없다는 시각이 다수였습니다. 전문가들은 “좌식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예상과 달리 에스프레소 바가 인기를 얻은 원인은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 때문으로 보입니다.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 가격은 1500원. 이탈리아 평균 에스프레소 가격인 1.2유로(약 1600원) 수준입니다. 가장 비싼 카푸치노도 3000원으로 일반 커피전문점보다 쌉니다. 임차료 비싼 넓은 매장을 운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입니다.
저렴하다 보니 한 잔만 마시는 손님이 드뭅니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에서 ‘에스프레소 바’를 검색하면 잔 여러 개를 겹쳐 쌓고 찍은 인증샷이 많습니다. 에스프레소 외에도 ‘카페 스트라차파토(초콜릿 가루를 뿌린 에스프레소)’, ‘카페 피에노(크림과 초콜릿 가루를 뿌린 에스프레소)’, ‘카페 오네로소(우유와 크림을 넣은 에스프레소)’ 등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한 커피 음료 두세 가지를 함께 주문해 마시고 찍은 사진들입니다.
서울 안국역 인근 ‘세컨드 커피’에서 만난 이성훈(35)씨는 “이렇게 여러 잔 마셔봐야 스타벅스 같은 곳에서 음료 하나 가격”이라더군요. 이민섭 대표는 “중장년 손님들은 ‘적은 양을 싸게 마실 수 있다’며 젊은 손님들보다 훨씬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럽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인기 요인입니다. 코로나로 여행길이 막히자 유럽에서 마시던 맛을 잊지 못해 찾는다는 겁니다. 서서 마시는 커피를 새로운 경험으로 여기며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있고요. 에스프레소 바 열풍이 이어지리라 업계에서 전망하는 이유입니다. 쓰고 진해 ‘한약 같다’며 꺼리던 에스프레소까지 즐길 수 있을 만큼 국내 커피 문화가 성숙했다는 징표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