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 밤비(Bambi). 이 만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분은 많지않을지언정, 적어도 표지와 포스터만으로도 ‘아, 밤비구나’라고 생각하실 분들 많을 겁니다. 표지의 아기사슴 밤비가 워낙 귀엽고 예쁘게 그려져있어서 천진난만한 숲속 친구들을 의인화시킨 환타지 스토리라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2차 대전 포연이 한창이던 1942년 공개된 이 작품은 상당히 무겁고 장중한 대 서사시입니다.
숲을 이끄는 왕사슴의 아들로 태어난 밤비가 사람의 총탄에 어미를 잃는 비극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나 늠름한 뿔을 가진 수사슴으로 자라난다는 성장 스토리입니다. 자신과 백년가약을 맺은 암사슴으로부터 자신과 닮은 쌍둥이 아기들이 태어나고, 밤비 부자가 늠름하게 나란히 서 있는 엔딩장면으로 이어지죠. 동물을 의인화해 가부장적 정서 속에 왕의 성장담과 대관식을 보여줬다는 면에서 ‘라이온킹’보다 반세기를 앞서간 원류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현실의 사슴 왕국도 이렇게 질서와 정의, 권위와 엄숙함으로 가득한 분위기일까요? 예상과 기대를 벗어날 때 반전의 충격은 큽니다. 위엄과 기품있는 수사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광분하고 난폭한 면모를 보여주는 외신 기사가 최근 게재됐습니다. 낚시·사냥 전문 온라인 소식지인 ‘아웃도어 라이프’에 얼마 전 ‘발정기의 수사슴이 암컷을 죽이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기사인데요. 야생동물 사진 작가인 조 서블레프스키(Joe Sublefsky)가 사랑이 싹터야 할 번식철 암수사슴 사이에 벌어진 비극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무대는 애팔래치아 산맥 남쪽의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스 국립공원입니다.
이날 사진촬영 워크숍차 캐터루치 계곡에 머물던 서블레프스키는 미국의 대형사슴 중 하나인 와피티사슴 무리와 맞닥뜨렸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부터 수사슴 세마리가 가열차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암컷들의 무리인 ‘하렘’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잔가지를 친 뿔을 앞세워 진격, 또 진격을 거듭했죠. 가장 힘세고 드센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는 법칙은 수천, 수만년째 반복되는 발정기마다 되풀이돼온 단 하나의 룰입니다. 마침내 승자가 결정됐습니다. 위풍당당한 뿔을 앞세우고 승리한 수컷이 암컷들의 무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수컷의 눈에 들어온 것은 ‘360′이라는 숫자가 적힌 표식을 달고 있던 암컷이었습니다. 사슴의 행태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붙인 표식으로 보입니다. 에티켓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수컷은 섣부르게 올라타려 하지만, 암컷은 짝짓기 준비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조차 수컷은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암컷 주변을 맴돌던 수컷의 다음 행동은 번식, 또는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이었습니다.
그 늠름한 뿔이 달린 머리로 암컷을 공격하더니 바로 땅으로 내다꽂았습니다. 좀 전에 하렘의 영유권을 두고 수컷들과 거칠게 다투던 그 기세로 암컷을 가차없이 짓밟고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렸습니다. 번식철 암컷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우람하고 늠름한 뿔은 동족 살상병기가 됐습니다. 그 거친 뿔로 바닥에 나동라진 암컷을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난데없는 공격을 누가 버텨내겠습니까. 가까스로 공격을 벗어나 비틀비틀거리며 도망치던 암컷은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수풀에 널부러졌고, 눈을 퀭하게 치켜뜬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름답고 청초함에 비견되던 사슴의 눈동자는 살생현장 당시의 절망과 공포를 말해줍니다. 현장을 생생하게 포착한 서블레프스키는 살상을 자행한 숫사슴에 대해 “테스토스테론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다음에 보실 유튜브(Zapping Sauvage) 동영상은 테스토르테론을 뿜어내며 짝짓기 권리를 지키련느 수컷들의 치열한 싸움을 담았습니다.
이 비극적 사례는 사랑과 대물림의 시기로 낭만적으로 포장되곤 하는 동물의 짝짓기철이 실제로는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보여주는 경우입니다. 사람에 있어서는 남성호르몬, 짐승에 있어서는 수컷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는 테스토스테론은 포유동물 뿐 아니라 새·파충류·양서류 등 척추동물 전반에서 발현됩니다. 때로는 극대화된 성적 매력, 아련한 부성애, 영역에 대한 집착, 저돌적 폭력성 등 종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죠.
이 중에서도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극도의 공격성으로 발현되는 경우는 한마리의 수컷이 여러마리의 암컷들로 구성된 하렘을 독차지하는 구도로 짝을 짓는 동물들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앞서 소개한 와피티 사슴입니다. 이 녀석 뿐만이 아닙니다. 공교롭 게도 유순하고, 충직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돼있는 소 무리중에서 짝짓기 철 수컷들이 위험천만하게 돌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소의 무리는 우제류(偶蹄類)라고도 하는데 두 개 또는 네 개의 발굽 또는 발가락을 가진 동물들입니다. 소와 사슴을 비롯해, 아프리카 사바나의 영양, 살인괴수 하마, 야생 들소와 물소, 사막의 낙타, 심지어 잡식동물이 된 돼지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들의 특징은 수컷들에게서 도드라지는 뿔입니다. 스크류모양으로 나선형으로 돋아난 쿠두를 비롯해, 중앙아시아의 야생양 아르갈리와 야생염소 마콜 등은 수컷의 뿔 자체가 아름다운 기하학적 모양을 하고 있죠. 이 뿔들은 테스토스테론이 발현되는 짝짓기철에는 라이벌을 쳐내기 위한 살상병기로 변신합니다. 동물을들 사육·관리하는 동물원 입장에서 테스토스테론은 대(代)를 잇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호르몬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육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성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전직 동물원 당국자는 “주요 동물원에서는 발정기 수컷들의 난폭행동에 대처하기 위한 케이스별 대처 요령까지 있다.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