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Vain’. ‘헛되이’ ‘허사가 되어’라는 뜻의 숙어죠. 학창시절 수많은 단어와 숙어가 총망라된 보캐뷸러리와 씨름하면서 유독 강렬한 인상으로 받아들였던 말 중의 하나입니다. 허무주의가 깊숙히 배어있는 말뜻이 주는 인상이 그토록 강렬했나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세상의 만물들은 그토록 끊임없이 싸우고, 매달리고, 버티는 것일까요. 여기 ‘In Vain’의 극단적 니힐리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야생동물 전문 인스타그램 계정인 레드 하트 네이처에 최근 올라온 사진입니다. 하드 스크류바 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연상시키듯 꽈배기모양으로 뻗은 두 개의 뿔이 얽히고 설켜있습니다. 말 그대로 교착 상태입니다. 이 뿔의 끝에는 갈색의 바탕에 흰 줄무늬를 한 짐승 두 마리의 얼굴이 겹쳐 있습니다. 이빨을 훤히 드러내고 두 눈은 치켜떴습니다. 그러나 미동도 없는 이 몸뚱아리에 생명의 기운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혼이 빠져나간 사체인 거죠. 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당사자들은 영양계의 터프가이로 꼽히는 그레이터 쿠두입니다.
검색을 해보니 2015년 보츠와나의 오카방고 삼각주에서 벌어진 상황이지만, 지금도 사바나 어딘가에서는 펼쳐지고 있을 참극입니다. 이 두 마리의 수컷 그레이터 쿠두는 짝짓기철의 최후의 승자가 되기위해 피터지는 싸움을 벌였다가 뿔이 꼬여서 얽히고 설키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은 놈들은 교착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겠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세가 흐트러지며 상황은 더욱 악화됐을 것입니다. 결국 거친 숨결을 내뿜다가 거꾸러진채 그대로 절명한 것입니다. 자연에서 죽음은 삶의 시작을 뜻합니다. 공원 관리인들이 사체를 처리하러 왔을 때 이미 일군의 청소부들이 야금야금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격한 투쟁 끝에 최후의 승리를 거둬 자신의 우월적 유전자를 만방에 뿌리려던 수컷 쿠두들의 노력은 이렇게 헛되이 마무리됩니다. 쿠두는 일런드·제레눅·워터벅과 함께 당당한 몸집으로 영양계의 4대천왕으로 통합니다.
일런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대한 몸집(머리몸통길이 최장3.5m·어깨높이 최고 1.8m)을 자랑한다면, 제레눅은 기린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목과 튼실한 근육질의 상반신을 뽐냅니다. 물과 뭍을 동시에 평정한 워터벅은 기름진 털에서 내뿜는 강렬한 체취로 존재감을 과시하죠. 쿠두의 트레이드마크는 뿔입니다. 몸집이 큰 그레이터쿠두와 상대적으로 작은 레서쿠두 모두 크고 스크류처럼 뒤틀린 매혹적인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쪽 뿔은 오른쪽 방향으로, 왼쪽 뿔은 왼쪽으로 회전하며 솟습니다. 완벽한 좌우대칭이예요. 그래서 쿠두의 뿔은 아프리카 사바나의 영양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웅장함과 기교를 뽐내죠. 이 뿔은 수컷의 전유물입니다. 때문에 쿠두는 그 어느 영양보다도 한눈에 성별을 구분하기 쉽습니다. 쿠두의 뿔이 얼마나 우아하고 위풍당당한지 보여주는 동영상(Hanru Strydom)입니다.
좌우대칭 기하학적 뿔을 머리 양옆에 단 쿠두 수컷은 목덜미부터 가슴방향으로, 또한 머리에서 등을 향해 갈기가 곤두서있습니다. 이렇게 머리부터 꼬리끝까지 테스토스테론이 차고 넘치는 듯한 이 수컷은 흥미롭게도 짝짓기 때 울부짖는 소리의 데시벨 수치가 같은 영양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지만, 사바나를 쩌렁쩌렁 울릴 괴성을 발산할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수컷 쿠두들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바로 수컷들의 싸움이죠. 사슴·영양 등 발굽있고 뿔달린 초식동물들은 대개 번식철에 싸움으로 서열정리를 한 뒤 승자가 독점적으로 짝짓기 권한을 가져가는 룰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다른 뿔을 가진 쿠두답게 수컷들의 권력투쟁도 한결 살벌하게 일어납니다.
서로 코로 상대방의 냄새를 맡으며 탐색전에 들어간 수컷 쿠두들은 뿔을 맞대고 상대방을 밀어냅니다. 이 싸움에서 상대방을 주춤거리게 하며 밀어내는 순간 승자가 되고, 패자는 물러납니다. 문제는 기하학적이고 아름다운 뿔이 상대방을 겨냥한 무기가 아닌 자신을 향한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엇비슷한 전력으로 치열하게 투쟁하던 뿔이 꼬이는 순간, 가련한 짐승들은 죽음의 문턱으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절체절명 순간 이들에게는 협업을 해서 어떻게 해서 둘 다 살아남을지 작전을 세우고 실행할만한 여유도 겨를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의도치 않게 얼굴을 맞댄 놈들이 바닥에 거꾸려저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죽음의 냄새를 맡고 하늘에서 떼지어 원형비행을 하고 있는 대머리수리들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상대도 안됐을 기막히게 운좋은 수컷쿠두가 짝짓기 철의 승자가 됐겠죠. 암컷을 향해 자신의 덥수룩한 목을 문질러대는 특유의 구애행동을 하면서요.
수컷들의 투쟁은 쿠두에게 여러모로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두 마리가 우열을 다투는 과정에서 뿔이 꼬여서 비명횡사 하는 경우만 있는게 아니거든요. 육식동물에게 먹잇감은 클수록 좋습니다. 사자처럼 완벽한 무리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투쟁중인 수컷만큼 손쉬운 사냥감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밀어내는데 정신이 팔려 눈앞에 천적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거든요. 남아프리카 크루거국립공원 폰도로 로지(Pondoro Game Lodge)가 올린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뿔을 밀치며 격렬하게 다투던 두 마리 수컷 쿠두의 혈투 현장에 암사자가 접근했습니다. 격렬한 혈투 끝에 기진맥진해있는 쿠두는 암사자에게 단순한 일용할 양식 차원을 넘어선 로또가 됐습니다. 집단 공격도 아닌 솔로 어택으로 이만한 덩치의 사냥감을 넘어뜨리는 행운은 이 사자의 생애에 다시 없을지도 모릅니다. 스러진 몸뚱아리가 누군가의 밥줄이 됐다는 점에서 대자연의 시각에서 쿠두의 희생은 그렇게 헛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야생에선 허무한 소비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럼에도 꼬인 뿔타래를 풀지 못한채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 쿠두의 치켜뜬 눈에서는 한(恨)이 느껴집니다. 그 죽음에 숙연하고, 연민을 느낍니다. 이 헛되고 처연한 죽음을 동력으로 생명의 바퀴는 다시 돌아갑니다. 냉정하지만 그게 사바나의 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