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작곡가 토마소 알비노니(1671~1751)의 탄생 350주년입니다. 알비노니는 동시대에 활약한 아르칸젤로 코렐리, 안토니오 비발디 등과 함께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황금기를 장식한 뛰어난 인물이에요.
알비노니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은 ‘아다지오 g 단조’입니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라는 명칭으로 유명한 이 곡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등장하는 슬픈 선율로 처음 듣는 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명곡이죠. 오케스트라 곡을 비롯해 다양한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편곡되었고, 가사를 붙여 성악곡으로 연주하기도 합니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가 크게 주목받은 것은 1992년 5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였어요. 당시 전쟁터에서 한 첼리스트가 이 곡을 연주해 전 세계인을 감동시켰어요. 사라예보뿐 아니라 폭탄 테러가 벌어졌던 이라크 바그다드의 거리, 2차 세계대전의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도 음악은 잠시 총성을 멎게 했습니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1992년 보스니아는 유고 연방 탈퇴를 선언한 뒤 내전에 휩싸였어요. 그해 5월 27일 사라예보에선 연방 탈퇴에 반대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쏜 포탄에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22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어요. 사고 다음날, 이 비극의 현장에 사라예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였던 베드란 스마일로비치(Smailovic)가 검은 연주복을 갖춰 입고 나타났어요. 그러고 나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했습니다. 연주는 사망한 22명을 추모하기 위해 22일간 이어졌어요. 그는 언제든지 민병대의 표적이 될 수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당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나는 음악가다. 다른 주민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의 연주는 사라예보 시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을 위로했죠. 캐나다 소설가 스티븐 갤러웨이는 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2008년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 이라크 바그다드의 폭탄 테러 현장에서도 첼로 연주가 울려 퍼졌어요. 이라크국립교향악단 지휘자 카림 와스피(Wasfi)가 테러로 힘겨워하는 주민들을 음악으로 위로한 거예요.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음악으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고 밝혔어요. 그는 또 “추하고 파괴적인 전쟁에 맞서 삶의 아름다움과 창조성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다”고도 했어요. 동료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그의 연주 동영상은 전 세계에서 3300만명 이상이 시청했답니다.
◇괴벨스도 막지 못한 전쟁터 히트송
2차 세계대전(1939~1945) 때 양 진영 모두에서 유행한 노래가 있었어요. ‘릴리 마를렌’이라는 노래예요. 이 곡의 가사를 쓴 사람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에서 복무했던 젊은 초병 한스 라이프였어요. 그는 짝사랑하던 자기 부대 간호사 마를렌과 고향에 두고 온 여자 친구 릴리의 이름을 합친 여인을 소재로 시를 썼는데, 나중에 ‘젊은 초병의 노래’라는 시집을 만들면서 그 안에 이 시를 넣었죠. 작곡가 노르베르트 슐체가 1938년 이 시에 곡을 붙인 것이 바로 ‘릴리 마를렌’입니다. 가사에는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이 전쟁으로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이 애틋한 느낌으로 채워져 있어요.
쉽고 친근한 멜로디와 중간 속도의 행진곡 리듬을 가진 이 곡은 독일인 가수였던 랄레 안데르센이 1939년 녹음했는데, 처음엔 크게 알려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1941년 독일군이 점령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의 방송국에서 이 노래를 전 유럽과 북아프리카에까지 방송하면서 모든 군인이 즐겨 부르는 히트곡이 됐습니다. 나치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노래를 부른 안데르센이 반(反)나치주의자라는 이유로 방송을 금지했지만, 듣게 해 달라는 군인들 요청이 거세지면서 어쩔 수 없이 방송을 허락했어요. 고향과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 때문인지, 이 노래가 나올 때면 치열했던 전투가 잠시 멈추기도 했답니다. 독일군뿐만 아니라 영연방군과 연합군에게도 큰 인기를 끈 이 노래는 그 후 전 세계의 언어로 가사가 만들어져 스테디셀러가 되었죠.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영어로 부른 버전도 유명합니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모두 앗아가는 무서운 전쟁의 한 복판에서도 음악은 울려 퍼져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어요. 음악이 지닌 신비하고 강력한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알비노니와 지아조토]
알비노니는 1694년에 첫 번째 작품을 출판하며 본격적인 작곡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어요. 그는 바이올린과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과 실내악, 오페라 50편 이상 등 다방면에서 음악을 남기면서 매우 왕성하게 활동했어요. 그의 곡은 특유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귀족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그의 대표곡 아다지오 g단조에는 놀라운 반전 이야기가 숨어 있어요. 이름과 달리 실제 곡을 쓴 사람은 알비노니가 아니라는 거지요. 이야기는 20세기 이탈리아의 음악학자이자 작곡가 레모 지아조토가 2차 세계대전 직후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독일 드레스덴의 도서관을 찾으며 시작됐어요. 지아조토는 거기에서 알비노니가 1708년 쓴 트리오 소나타 작품번호 4의 일부분으로 추정되는 악보를 발견했고, 거기에 음악적 살을 붙여 1958년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 알비노니 주제에 의함’이라는 제목으로 악보를 출판했습니다. 이 곡은 발표 직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여러 음반과 영화 음악 등으로 소개되며 널리 알려졌어요. 그런데 정작 지아조토는 1998년 사망할 때까지 알비노니가 남긴 악보를 공개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점차 이 곡이 지아조토의 순수한 창작품일 거라고 의심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가 사망한 후 마지막 조수가 알비노니의 악보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해 현재는 알비노니의 악상을 토대로 지아조토가 나머지를 완성해 낸 공동 작품이란 설이 힘을 얻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