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지친 시민들을 위로하는 야간 문화행사가 다음달 14일까지 경기 고양시 행주동에 있는 행주산성에서 열려요. ‘행주가(街) 예술이야(夜)’란 제목의 전시·공연·체험 프로그램이에요.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초기인 1593년(선조 26년) 전라도 순찰사 권율(1537~1599) 장군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행주대첩의 현장입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승전’으로 불리는 전투입니다. 하지만 이 전투가 어떤 맥락에서 벌어졌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잘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답니다. 행주대첩은 어떤 전투였을까요?
◇조선군 3000 vs 일본군 3만의 전투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을 침략해 임진왜란이 시작됐어요.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 임금은 의주로 파천(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하는 것)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1월 초 평양성 전투로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했지만, 그달 27일 서울 북서쪽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패해 전세는 다시 일본군에게 유리해졌습니다.
이때 한양 근처에서 수도 탈환을 노리고 있던 조선군 중에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사가 한강과 인접한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권율은 1592년 7월 충청도 금산의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라도를 지켜낸 뒤 한양 부근으로 북상한 상태였죠.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승기를 이어 보름 만에 조선군마저 격파하고 나서 다시 반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병력을 모아 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을 총공격했습니다.
일본군 병력은 무려 3만명의 대군인 반면, 권율 장군의 군사는 의병과 승병(스님으로 이뤄진 군대)을 합쳐 3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대 10′의 아주 불리한 싸움이었죠. 더구나 일본군의 주요 지휘관이 모두 이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인 이시다 미쓰나리, 침략의 선봉장 중 하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백전노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일본 전국시대를 거쳐 전투력이 최고조에 이른 쟁쟁한 장수들이 행주산성으로 들이닥쳤던 것이죠. 이 모두를 권율이 상대해야 했습니다.
◇승리의 비밀
일본군은 병력을 3진으로 나눠 모두 9차례에 걸쳐 행주산성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을 물리칠 네 가지 승리 전략이 조선군에겐 있었어요. ①험준한 요새 행주산성을 택한 권율의 전략 ②화력이 월등한 조선군의 무기 ③실전을 거친 조선군의 전투력 상승 ④한강의 지리적 이점을 살린 조선 수군의 활약이었습니다.
백제 때 처음 건설된 행주산성은 석성과 토성(흙으로 쌓은 성)의 이중 구조에 목책(나무로 만든 울타리)을 다시 두 겹으로 두른 요새였습니다. 이러니 대군이 공격해도 쉽게 함락할 수 없었죠. 여기에 권율의 조선군은 화약 무기 발사 장비인 ‘화차’, 일종의 로켓포인 ‘신기전’, 대량 살상 포탄 ‘비격진천뢰’, 수군이 사용하던 ‘천자총통’ 같은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산성의 좁은 입구를 통해 진격하던 일본군 1·2군은 조선군의 거센 공격으로 궤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군 3군은 누각을 짓고 높은 곳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조선군의 천자총통에 맞아 누각조차 불타버렸습니다. 총사령관 우키타가 이끄는 4군이 진격해 목책을 뚫었지만 조선군의 반격으로 우키타와 이시다는 모두 부상을 입고 퇴각했습니다. 5군이 성에 불을 지르는 화공을 쓰려 하자 조선군은 준비해 둔 물을 끼얹었죠. 서쪽 비탈로 6군이 쳐들어 왔으나 조선 승병이 물리쳤어요. 7군이 성 서쪽을 뚫고 들어와 조선군은 가장 큰 위기를 맞았는데, 일본군이 자신 있어 하던 백병전(칼이나 창 같은 무기로 직접 맞붙는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화살이 거의 다 떨어져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어요.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수군 소속 충청수사 정걸이 배 두 척에 화살 수만 개를 싣고 한강을 거슬러 왔던 것입니다. “저게 뭐냐, 혹시 이순신이 탄 배 아니냐?” 당황한 일본군이 물러날 기세를 보였습니다. “추격하라!” 권율의 명령에 조선군이 성 밖으로 나오자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주치마’ 얘기는 근거 없대요
행주대첩을 계기로 일본군은 반격에 실패하고, 두 달 뒤 한양에서 철수해 남쪽으로 후퇴하게 됐습니다. 임진왜란의 전세가 완전히 바뀐 것이죠. 행주대첩이야말로 임진왜란의 결정적 고비였던 셈이죠.
행주대첩 하면 부녀자들이 병사들을 도우려 치마에 돌을 담아 퍼 날랐다는 ‘행주치마’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행주치마는 부엌일 할 때 치마 위에 덧입는 작은 치마예요. 하지만 이는 별로 근거가 없는 얘기예요. 행주산성 근처엔 민가가 별로 없어서 전투에 부녀자들이 참여했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행주치마라는 말이 행주대첩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에요. 행주대첩보다 76년 전인 1517년(중종 12년) 어문학자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란 책에 이미 한글로 ‘행주치마’란 말이 나오기 때문이죠. 여기엔 행주치마의 뜻은 적혀 있지 않고, 10년 뒤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란 책에 다시 행주치마가 등장하는데, 여기선 ‘행주’를 ‘닦는 천’이라고 풀이해요. 이 ‘행주’가 지명 ‘행주(幸州)’와 발음이 같다 보니 행주대첩과 연관이 있다고 나중에 얘기가 덧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대첩(大捷)’과 ‘대전(大戰)’]
‘대첩(大捷)’은 ‘크게 이겼다’는 뜻이에요. ‘행주대첩’ ‘한산대첩’ ‘명량대첩’에 ‘대첩’을 붙인 것은 우리가 크게 이겼기 때문이지요. 크게 진 일본 입장에선 이 전투들을 ‘대첩’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만약 어떤 스포츠 종목에서 박빙의 차이로 세계 1·2위를 다투는 팀이 서울에서 경기를 앞두고 있을 때 “서울대첩이 열리게 됐다”고 표현하면 맞는 걸까요? 아주 어색한 말이에요. 아직 경기 결과가 안 나왔는데 이 말을 쓰는 건 두 팀 중 하나가 크게 이길 거라고 예상한 셈이 되니까요. 이때는 ‘크게 싸운다’는 뜻의 ‘대전(大戰)’을 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