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이 조선 시대 초상화 기획전 ‘열에 일곱’을 내년 2월 27일까지 연다고 해요. 전시 작품 중 조선 후기 문신 조영복(1672~1728)의 초상화 두 점은 다른 작가가 그렸는데도 같은 사람을 그렸음을 단번에 알 수 있어요. 그림이 무척 정교하고 세밀하기 때문이지요. 이번 전시뿐 아니라 조선 시대 초상화는 그 정교함 때문에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견줘도 손색없다는 말까지 나와요. 어떻게 그렇게 세밀하게 그릴 수 있었을까요?
◇똑같은 주름과 검버섯, 알고 보니 같은 사람?
얼굴이 너무 닮아서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두 초상화가 있어요. 정조 때 호조참판을 지낸 이채(1745~1820)와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 이재(1680~1746)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입니다.
손자 이채는 높이 솟은 정자관을 썼고 할아버지 이재는 헝겊으로 만든 복건을 썼지만, 두 사람 얼굴이 너무 닮았어요. 갸름하고 턱이 뾰족한 얼굴에 위로 굵게 올라간 눈썹, 긴 콧등과 귀까지 똑같이 생긴 거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마 주름과 검버섯까지 같은 자리에 있어요. 그래서 요즘엔 ‘이재 초상화로 알려졌던 작품은 사실 손자 이채의 초상화’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어요.
이번엔 여러 사람을 함께 그린 ‘단체 초상화’를 한번 보죠. 조선 후기 조계(1740~1813), 조두(1753~1810), 조강(1755~1811) 삼형제를 한 화폭에 그린 ‘조씨 삼형제 초상’입니다. 다 조금씩 다른 얼굴이지만 마른 얼굴, 두드러진 광대뼈, 매서운 눈빛을 보는 순간 한눈에 ‘아, 이 사람들은 형제구나!’ 하는 감탄이 나옵니다.
◇머리털 한 올도 다르면 안 돼
조선 시대 초상화는 왜 이토록 사진같이 대상을 세밀하게 그렸을까요? 조선의 국가 철학인 성리학(유교)에서 전통적으로 그림이나 조각이 원래 사람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공자 같은 성인의 상(像)도 ‘진짜 같지 않다’는 이유로 모두 땅에 파묻고 나무로 만든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대신 놓았다고 합니다. 결국 초상화도 주인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면서 자연스레 세밀한 초상화가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임금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의 기록 ‘승정원일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털끝 하나 머리털 한 가닥이(일모일발·一毛一髮)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소혹차수·小惑差殊) 곧 다른 사람이다(즉편시별인·卽便是別人).”
◇피부병 분석까지 가능한 조선 초상화
그런데 이런 정교함이 뜻밖의 발견을 낳기도 했어요. 피부과 전문의인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은 1979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초상화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하다 깜짝 놀랐어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추사의 뺨에서 천연두 자국이 보였던 거예요. ‘마마’라고 한 천연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무서운 병이었죠. 얼굴의 흉조차 생략하지 않은 초상화 덕분에 추사도 천연두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 총장은 훗날 조선시대 초상화를 바탕으로 피부 질환에 대한 논문을 썼어요. 초상화 268점을 조사한 결과 20종의 피부 병변(병 때문에 일어나는 생체의 변화)을 발견했어요. 초상화 113점에선 점, 85점에선 검버섯, 37점에서 지루각화증(돌출한 검버섯)이 발견됐죠. 또 73점에선 천연두 흉터를, 9점에선 흑색 황달을 찾아냈어요.
예컨대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화에선 오른쪽 눈썹 위 이마의 작은 혹(모반세포성모반)이 보였대요. 또 선조 때 판의금부사를 지낸 홍진(1541~1616)은 초상화에서 코가 주먹만큼 부풀어 올라 있었어요. 이런 피부병 흔적은 과시욕이 강하게 드러나는 중국 초상화나 얼굴을 밝게 칠한 일본 초상화에선 결코 볼 수 없어요. 이에 대해 “올곧음과 정직함이라는 조선 선비 정신이 초상화 기법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보기도 해요.
◇사람의 기품까지 그려냈다
조선 시대 초상화가들은 인물의 외면만 치밀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과 ‘기품’까지도 그려냈어요.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라고 하는 인물은 도화서(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화원 출신으로 임금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御眞畵師) 이명기(1756~?)였습니다.
그는 1792년(정조 16년) 임금의 명으로 당시 좌의정인 채제공(1720~1799)의 초상화를 그렸어요. 그림을 보면 그가 눈동자가 한쪽으로 몰린 사시(斜視)였음을 알 수 있죠. 그리고 표정에는 우울한 기색이 감도는데, 어떤 이는 초상화를 보고 “백성과 임금을 동시에 걱정하는 재상의 마음이 드러난 것 같다”고 평가해요. 훗날 정조 임금이 이 그림을 보고 나서 채제공에게 “지금과 달리 얼굴에 우울한 기색이 감돈다”고 하자 채제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제 기분까지 그려낸 이명기는 정말 뛰어난 화가입니다.” 1792년은 남인 출신인 채제공이 노론 세력의 공격을 받아 한창 골머리를 앓던 때였습니다.
이명기가 남긴 또 다른 작품이 조선 초상화의 걸작 중 하나라고 하는 정조 때 문신 서직수(1735~1811) 초상화입니다. 이명기는 얼굴을 맡았고, 조선 최고 화가 단원 김홍도(1745~?)가 옷과 관을 그린 합작품이죠. 뺨의 한 모공에서 털이 세 개 나온 것까지 보여요. 이 작품은 ‘조선 유생의 품격과 꼿꼿함, 단아한 자태를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림의 주인공은 “내 마음만은 그리지 못했구나” 하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카메라 오브스쿠라]
현대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 서양에서 쓰던 원시적 형태의 사진기가 카메라 오브스쿠라(camera obscura)예요. ‘어두운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죠. 캄캄한 공간에서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에 바깥 풍경이 거꾸로 비치는데,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은 이 원리를 이용해 캔버스에 영상이 비치게 하고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17~18세기 조선에도 카메라 오브스쿠라가 들어왔어요. 다산 정약용은 형 정약전 집에서 학자 이기양이 ‘칠실파려안’을 설치하고 거꾸로 비친 그림자를 따라 초상화 초본을 그리게 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칠실파려안이 카메라 오브스쿠라로 여겨집니다. 초상화가 이명기가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의 71세 때 초상화를 그릴 때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사용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입체감을 살린 얼굴 표현, 옷 주름 묘사의 명암법이 그 근거라는 것이죠.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