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양국 국민뿐 아니라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어요. 러시아는 10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내 총 12개 주요 도시에 미사일 공격도 감행했어요. 두 나라의 전쟁은 언제쯤 끝날까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갈등을 넘어 화합의 길로 나아간 다른 나라의 역사를 알아볼게요.
◇엘리자베스 2세도 아일랜드에 사과
영국 서쪽에 있는 섬인 아일랜드는 영국령인 북부 아일랜드와 독립국인 아일랜드공화국으로 이뤄져 있어요. 1534년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침략하며 식민통치를 강화했어요. 영국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구교도)를 성공회로 개종시키기 위해 아일랜드 북부에 영국 성공회 신자(신교도)를 이주시켰죠.
이로 인해 크고 작은 대립이 이어지던 중 1845년부터 약 7년간 아일랜드인의 주식(主食)이었던 감자가 대량으로 병들어 수확할 수 없게 되면서 대기근이 들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영국인 지주들은 아일랜드인을 착취하며 곡식을 축적했죠. 아일랜드 사람 약 100만명이 죽어갈 때, 식민통치 중이었던 영국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곡물의 수입을 막기까지 했다고 해요.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원망은 깊어졌어요. 그러다 1918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만들어 영국 신교도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그 결과 1921년 영국과 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돼 아일랜드 32주 중 남부 26주가 자치권을 얻게 되고, 1949년 아일랜드공화국으로 완전히 독립합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에 포함되지 못한 북아일랜드 6주에서는 구교도에 대한 신교도의 탄압이 이어졌어요. IRA의 반발은 거세졌고, 1972년 1월에는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던 구교도에게 영국군이 발포하며 사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IRA는 이에 보복하기 위해 테러를 하기도 했어요.
영국은 이런 일을 오랫동안 모른 척해왔어요. 그러다 1997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일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어요. 이어 1998년에는 영국과 IRA의 평화협정이 체결됐고, 2002년 IRA는 “우리의 폭력적 행위(테러 등)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의 가족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성명을 신문에 발표했어요.
이후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1972년의 사건이 ‘비무장 시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 사건’이었음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어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도 2011년 아일랜드를 방문해 아일랜드 독립운동 중 사망한 이들에 대한 조의를 표하고 사과하며 영국과 아일랜드는 화합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다만 현재에도 북아일랜드에서는 구교도를 중심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요. 북아일랜드 내에서 영국과 연결된 신교도의 힘이 강해 당장 독립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요.
◇서독·동구권 국가 관계 개선 노력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서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어요. 전쟁 중 폴란드의 국토가 초토화되고, 사회 기반 시설 역시 거의 무너졌지요. 독일은 폴란드 남부 레서폴란드주에 있는 도시 오시비엥침에 1940년 강제 수용소를 건설했는데요. 독일은 중세 시대부터 이 도시를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불렀는데, 이곳에 세워진 수용소가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이곳에 수용소를 건설한 이유는 도심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까운 곳에 철도 시설이 있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이송하기 좋기 때문이에요. 초기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하는 시설이었어요. 하지만 1941년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명령으로 대량 학살 시설로 확대됐죠. 폴란드인과 유대인은 이곳에서 각종 고문과 질병, 굶주림, 인체 실험 등으로 고통받았어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안에는 가스실과 교수대 등이 설치돼 있었죠. 이곳에서 4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돼요.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1913~1992)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추모지에서 2차 대전 중 나치가 행한 만행에 대해 무릎을 꿇고 공식적으로 사과합니다. 사실 브란트가 무릎을 꿇었던 장소는 유대인 집단 거주지였던 게토였고, 폴란드인보다 유대인과 더 깊이 관련된 곳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서는 이 일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요. 당시 서독은 폴란드 정부의 과거사 배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상태였기도 하고요.
하지만 총리의 사과는 이후 평화 정치의 상징이 되면서 전 세계에 화합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됐어요. 브란트 총리는 서독과 동구권 국가의 관계 개선 노력을 인정받아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3200여 명 사망한 인디언 기숙학교
18세기 후반부터 유럽계 캐나다인은 유럽인이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살아왔던 인디언 원주민을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시키려고 했어요. 19세기 중반 캐나다 총독은 인디언 문명화 정책 중 하나로 기숙학교 설립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인디언에 대한 문명화 추진법으로 이어져 제도화됐죠.
백인들은 캐나다 원주민의 아이를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내 인디언 기숙학교에 입학시켰어요. 아이들은 이곳에서 인디언의 언어와 전통을 버리고 유럽과 캐나다 문화에 동화되도록 강요받았어요. 인디언 문화가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로 개종하라고도 강요받았죠.
기숙학교의 환경은 열악했어요. 식량도 부족했고, 비위생적이었죠. 아이들은 질병에 걸려도 치료받기 어려웠어요. 심지어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할 것을 강요받기까지 했어요. 이런 과정 중에 고문과 구타 등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서슴없이 자행됐고, 많은 아이가 인디언 기숙학교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이런 행위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끝이 났어요. 이후 인디언 기숙학교의 아동 집단 매장지와 학대 등에 대한 각종 진상 조사가 이뤄지는데요. 이 기간 3200명 이상의 아동이 사망한 것으로 보여요. 살아남은 아이들의 경험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어요. 부모를 다시 만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거나 갈등을 빚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후 인디언 사회는 세대 간 갈등으로 가정이 해체되며 거의 무너지게 됩니다.
인디언 기숙학교의 사례는 식민주의 동화정책의 극단적 사례 중 하나로 꼽혀요.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사과가 없었던 것이 유럽계 캐나다인과 인디언 간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2008년 인정했어요. 그리고 “캐나다 정부는 이 나라 원주민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했죠. 이 사과는 캐나다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하는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으로 연결되는 힘이 됐고, 지금도 캐나다에서는 화합의 과정이 이어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