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첩대장에 혁명 권유 ##.

1961년 1월 하순 박정희 2군 부사령관은 2군 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에
게 "영천 정보학교에 함께 다녀오자"고 했다. 정보학교장은 한웅진 준장.
이 대령은 이때 모르고 있었지만 박, 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거사계획
을 의논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영천을 오가는 차중에서 이희영을 한번
떠보려고 했다. 부사령관 승용차 안에서 박정희는 방첩대장 앞에서 할
화제가 아닌 정치 이야기로 시종했다.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오. 이 대령, 아시겠소.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한단 말입니
다."
"버마식 쿠데타라니요. 그게 어떤 식의 쿠데탑니까.".

"버마식 쿠데타란 군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일정 기간 통치하다가
민간정부에 정권을 넘겨주는데 민간정부가 군의 의향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는 것이에요.".

이희영은 이 말을 듣고는 비로소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왔다. 이희영은 '방첩대장인 나에게 이런 이야
기를 할 정도이면 장도영 사령관하고도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기회를 봐서 장도영 사령관이 쿠데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 장 장군은 육
군참모총장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고 최경록 참모총장이 2군 사령관으로
내려왔다.

박정희는 이 무렵 자신과 장도영의 관계에 대해서 증언한 적이 있다.
5·16 직후에 있었던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 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한 증언이 그것이다. 그 요지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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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준비하면서 '버마식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
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박정희는 김종필이 초안을 잡아온 5개항의
혁명공약에 6항을 직접 써 덧붙였다. 그것이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문장이었다. 박정희는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준 뒤에도 군대는 정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정치를
감독하는 대형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었다. 버마 이외에도 터키의 군부가
국가이념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파당적인 정치가들을 감시, 감독하는
역할을하고 있다.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말 파샤에 심취했던
박정희는 이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그런 생각은 조선
시대와 해방 이후 한국을 지배해온 양반-문민 정치세력보다 군대가 더
실용적, 애국적, 자주적이며 선진된 집단이란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었다.

박정희 근대화 이념의 핵심인 그의 역사관을 이해하지 못한 일부 학
자들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기 위
하여 경제발전에 주력했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에
대한 그런 죄책감(또는 열등감)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는 조선조 양반세력, 해방 후의 한민당, 자유당, 민주당 세력을 동류의
봉건적 정치세력으로 보았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 이런 문장이있다.

<4·19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
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
엎은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후엔 군인이 일단 정권을 넘겨주면 내부 단결이 깨져
정치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는 판단을 하고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는 쪽으로 선회하여 버마식, 터키식의 군부개입을 포기한다.

쿠데타 계획을 전반적으로 지휘하는 박정희 입장에서는 김종필을 중
심한 8기 중령급 장교들로써만은 정권을 뒤엎는 행동이 불가능했다. 8기
생들은 거의가 사단, 군단, 군사령부의 참모로 있었고 실병지휘관이 아
니었다. 채명신 5사단장, 박춘식 12사단장, 박치옥 공수단장, 문재준
6군단포병단장 같은 수도권의 실병지휘관들은 박정희가 육사 중대장으로
서 가르친 육사 5기 출신들이었다. 이들 5기 그룹을 포섭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의 대리인 역할을 한 사람이 5기 출신인 당시 6관구 참모장 김재
춘 대령이었다. 1961년 2월 하순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김 대령
을 모 요정으로 불러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중요한 합의를 했다고 한다.

'4·19기념일에 학생 시위가 발생하면 정부는 수도권 부대를 진압부
대로 동원할 것이다.그때 서울로 들어오는 이 부대를 혁명군으로 이용하
여 서울시내의 정부기관을 접수해버린다'는 시나리오였다. 진압군으로
위장한 혁명군이 합법적으로 서울시내로 들어오기 위해선 4·19 그날 대
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정부가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편 다음 진압군을 동
원해야 한다. 이진압작전 계획을 입안할 사람은 수도권을 관할하는 6관
구작전참모 박원빈 중령이었다. 육사 8기인 그는 이미 여러 가지인맥을
통해서 박정희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를 작전참모로 데리고 온 김재춘
참모장, 자유당 말기부터 박정희와 혁명을 모의했던 유원식 대령,그리고
육사동기로서 김종필 그룹에 속해 있었던 옥창호, 김형욱중령으로부터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하는 혁명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있었던 것이
다.

박원빈은 거사일엔 혁명군 출동계획으로 둔갑할 이 폭동진압 계획을
'비둘기작전'이라 이름 붙이고 세부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3단계로 되어 있었다. 1단계 폭동에 대해선 서울시내 5개 헌병대로 대처
한다. 시위가 2단계로 악화되면 서울 근교의 제30, 33사단과 제1201 건
설공병단 병력을 동원한다. 제3단계에선 야전군(1군) 산하의 1-3개 사단
을 서울로 불러들인다. 나중에 해병대와 공수단이 포섭되자 박원빈은 이
들 부대도 동원대상으로 계획에 집어넣었다.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
(* 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