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
경험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19세기 서세동점과

20세기 두차례 세계 대전,

동서냉전의 거센 물결속에서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외교의

힘이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의 끈은 외교 뿐이었고, 그때의

외교는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과

영토상실을 불가피하게 수반했다.

그러나 태국인은 [작은 손실]을
감수하는 대신 왕조와 영토,
국민이라는 [큰 것]을 지키는
지혜를 발휘해 왔다.

19세기 태국은 서구 제국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끼여
풍전등화 신세였다.
인도와 버마를 접수하고
동진하는 영국의 압력에
차크리 왕조는 대외무역 독점권을
포기하고 북부 4개주를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차이나를
식민화하고 서진해 오는
프랑스에는 팍라이와 참파싹 일대,
캄보디아의 바탐방과 씨엠립 지역을
떼주어야 했다. 하지만 태국은
영불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지켰다.
프랑스와 충돌을 피하고 태국을
완충지대화하려는 영국의 전략을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1차 대전때 태국 정부는 군과 국민의
분노를 누르고 오히려 침략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을 도왔다.
미국의 참전 이후 프랑스에
군대까지 파견했다.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후 태국은
전리품으로 수백만 달러와 독일
전함을 받고 국제연맹 헌장의
조인국가가 됐다. 당장의 감정을
누르고 국가의 장래를 먼저 생각한
지도층의 이성적 결정이 갖다 준
결실이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인도차이나에 있던
프랑스 군대가 유럽 전선으로
옮겨간 틈을 이용, 프랑스에
빼앗겼던 캄보디아의 바탐방 일대를
되찾았다. 일본이 참전하자 태국은
일본편에 섰다. 일본을 따라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도 했다. 욱일승천
기세의 일본과 맞붙어 입게 될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적대적인 일반 국민의 정서는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무시됐다.

일본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태국은 또 변신했다. 국왕은 대미,
대영 선전포고가 무효라고
발표했다. 주미 대사였던 세니
프라못을 총리로 기용했다. 이런
태국에 미국은 우호적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중 빼앗긴 땅
반환과 피해보상을 요구, 태국
정부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전후 동서대결 와중에 태국은
친서방 외교노선을 견지했다.
70년대에는 데탕트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실리외교로 선회했다.

74년부터 중국, 동유럽과 관계를
개선했고, 76년 미군이 철수하자
베트남과 국교를 수립, 잠재적
위협을 차단했다. 미-소-중
강대국과는 등거리를 유지하면서
동남아시아 인접국가와
지역연대(아세안)를 주도했다.

남북한에 대해서도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 차상호
교수는 "왕조 성립후 740년간
독립을 지켜온 태국 외교사를
관통하는 것은 [실용주의]"라고
말한다.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고,
소탐대실하지 않은
냉정함이 약소국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실용주의는 외교현장에서 유연함과
타협, 대세순응적 태도로 나타난다.

비자립적이며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도 받는다.
그러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태국인이 근본과 원칙을 버린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영토유지와 독립이었다. 또 정세
변화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정권의
뒤에서 왕실이 굳건히 받쳐주고
있는 통치구조상 이점도 있었다.

그래서 태국 외교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를 잃지않는
[대나무 외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한 전 참사관 홍순경씨 일가
납치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도
태국식 외교술을 볼 수 있다. 남북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국제법 원칙 준수에는 단호하다.
그럼으로써 태국은 누구도
무시못하는 주권국가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