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연극 무대에 특별한 눈길을 줄 만한 창작극 한 편이 오른다.
24일부터 12월 19일까지 종로 5가 연강홀에서 공연되는 극단 신화의
'사랑'(오은희 작, 김영수 연출)이다.

수많은 예술이 반복해온 테마 자체를 거두절미하고 제목으로 대뜸
내세운 연극 '사랑'은, '요즘 대학로 연극'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어떤 틀을 깬다. '비좁은 소극장, 너무 어렵든지 아니면 참을수 없이
가벼운 극단적인 작품들, 그리고 대체로낯선 배우들'. 이 연극은 이런
풍토에 작은 반란이라도 시도하는 듯하다. 출연진들 면면부터가 근래에
보기드문 황금 조합이다. 경륜의 여배우 윤소정, 화술의 달인 이호재,
30대 남자 배우중의 발군 박지일, 아버지(전무송) 그늘을 벗어나고
있는 여배우 전현아, 그리고 고인배 최준용 등 개성파들…. 50대부터
20대까지, 연기력을 승부처로 삼은 탄탄한 연기자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한 편의 연극에 출연한 일은 근래에 드물었다.

이들이 꾸미는 연극 '사랑'은 모처럼의 정통 리얼리즘 연극이다. 그
사랑 이야기는 달콤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가족애'와 충돌해버린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다. 주인공들은 마음 한구석에 상처 하나씩을
지우지 못하고 사는 영혼들이다. 중년 무용가 윤여진(윤소정)은 무용에
대한 열정이 너무 컸기에 남편도 딸도 버리고 이혼한 채, 오로지
예술과 벗하며 살고 있다. 연극평론가 강진영(박지일)은 사춘기 시절
계모의 육체적 접근을 뿌리쳤다가 계모가 자살하자 충격을 안고
미국으로 도망가 사는 남자다. 남자는 미국에서 외로운 소녀
지희(전현아)를 만나지만, 그녀의 저돌적 사랑에 당황해하며 귀국한다.
돌아온 고국에서 남자는 따뜻한 영혼을 가진 여진을 만나고, 이
여인에게서 상처를 어루만져줄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진이
다름아닌 젊은 여성 지희의 어머니임을 알게 됐을때, 모녀와 한 남자의
삶과 사랑은 주체못할 파국으로 향한다.

그야말로 전형적 멜러드라마 구도다. 그러나 연극의 재미는 모녀간을
얽어맨 사랑의 쌍곡선 같은 부분에 있지 않다. 이 충격적이고 드라마틱한
비극 곳곳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사랑의 진실들이 극의 알맹이가 된다.
사랑을 갈구하는 상처입은 영혼들, 주체못할 애증에 휩싸이는 인물들이
무대에서 고비마다 몸부림치며 내뱉는 대사들은, 사랑으로 고민해본
모든 이들 가슴에 꽂힐 것 같다. 이 작품은 '관객과 함께하는 연극'을
고집해온 극단 신화의 창단 10주년 기념연극이다. 이 극단은 그간
고전명작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비롯 올해 '해가 지면 달이
뜨고'에 이르는 서민극 시리즈등으로 리얼리즘 연극의 맥을 이어왔다.
연출자 김영수씨는 "때론 지울수 없는 상처를 안기면서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랑의 실체를 음미해보면서 삶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가
보자는 연극"이라고 말한다.

번잡스런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오늘의 관객들에게 이 연극은
묻는다. '우리에게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02)923-2131.

(* 김명환기자mhkim@chosun 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