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제정러시아시대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천정의 웅장한 벽화가 여행객들을 압도한다.

## 눈덮인 자작나무 숲...가도가도 끝없는 ‘설원의 제국’##


시베리아 철도의 동쪽 출발점이 되는 블다디보스토크 임항역은 낡고 축
처진 듯한 시 일반의 인상과는 달리 새롭고 산뜻한 역사를 갖추고
있었다. 근년에 채색된 것 같은 대합실 천정화의 절반이 자본주의
러시아의 발전과 아울러 옛 제정 러시아의 영광을 담고 있어 좀
뜻밖이었다. 대중이 모이는 곳에 크레믈린 궁을 배경으로 한 황제와
대주교와 귀족들의 행렬이라니.

역장과의 면담 때문에 시간에 쫓겨 뛰듯이 플랫폼에 나가보니 열차는
벌써 철길 위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번쩍이는 단추 달린 회색
순모 코트에 가죽장화를 신고 털모자를 쓴 여차장이 여권을 점검하는데
여간 고압적이 아니었다. 짐을 올려놓고 남은 몇 분 동안 열차 꼬리부분
플랫폼에 있는 시베리아철도 출발점을 촬영하는 것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시베리아 철도를 '철의 실크로드'라 한다면 그 횡단열차는 쇠로 된
낙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입한 승차권이 룩스(lux)라는 2인승
침대칸이어서 그랬는지 처음 탔을 때는 낙타등 치고 호사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차 탁자가 놓인 통로를 중심으로 두 개의 침대가 갈라져
있는 객실 한 칸이 두 사람의 전용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열차가 시가지를 빠져나가는 동안 지난 이틀 쫓기듯 훑어본
블라디보스토크의 전체적인 인상을 정리했다. 비행기 안에서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너무 되돌아보기만 한 것 같아 슬며시 객쩍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돌아봐야 하는 법, 그럴 때 한 상징으로
쓸만한 곳이 떠올랐다. 블라디브스톡 중심가에 서있는
'현대'호텔이었다.

'현대' 호텔은 서울 계동에 있는 현대 사옥의 양식을 그대로 옮겨 지은
블라디보스토크 최고급 호텔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헤매다가 불쑥 나타나는 그 낯익은 건물을 보는 것은
한국관광객에게는 틀림없이 한 감격이 될 것이다.

그 호텔은 한 때 우리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다 적지 않은 적자만
보고 흐지부지 끝나버린 벌목사업 다음으로 큰 현대의 시베리아
투자였다. 그러나 한국식당을 빼면 커피숍이고 바고 객실이고 휑하게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절로 적자를 짐작케 했다. 사업과 연관된 정보와
현지 실정의 정확한 파악 없이 이루어진 투자의 결말을 거기서 다시
보게될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나를 달래준 게 두 사업 모두에
책임자로 참여했던 전현대 간부의 말이었다.

" 그렇지만 이걸 즉흥적인 투자의 시체나 식은 냄비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다소 비싼 수업료를 물기는 했지만 저는 분명 이 시베리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고, 또 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그곳에서 영주할 뜻을 밝혔는데, 나는 그의 시베리아
혹은 블라디보스토크 바라보기에 동조하고 싶다.

기차가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곧 시베리아의 설원이 시작되었다. 간간
만나게 되는 얼어붙은 아무르강 하류를 빼면 백화(자작)나무 숲과
침엽수림, 그리고 여름이면 초원으로 변한다는 눈 덮인 벌판의
연속이었다. 영화 속의 장면과 아이적의 상상으로 합성된 광경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는데, 특히 눈빛에 반사된 희디흰 백화나무 줄기는 끝없는
숲을 이루며 더 압도적인 미감을 자아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차창 밖으로 우스리스크 역의 우중충한 모습을
본지 오래되지 않아 나는 벌써 시베리아 한 복판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가 밖에는 눈발까지 뿌려 시베리아를 더 실감나게 하니
어쩌겠는가. 진작부터 나던 술 생각을 더는 억누를 수 없어 준비해간
위스키를 찔끔거리다가 대오각성한 듯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시베리아에 왔으면 보드카를 마셔야지, 이 무슨 흥취 모르는 짓인가!”

그리고 식당 칸으로 우르르 달려가 40도가 넘는 보트카를 물 마시듯
하다가 저물기 바쁘게 내 객실로 돌아와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잠이라기보다는 보드카에 혼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벌써 이튿날
한낮이었다. 때마침 기차가 정차해 잠시 땅에 내렸다. 대략 스물 네
시간만에 다시 밟아보는 흙이었다. '비라'라는 작은 도시였는데 아직
얼얼한 머리로 역 구내를 서성거리다 보니 작은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가 우리 동지 아니센카와 그의 아내를
죽였다.'

한 마르크스 선생께 물어보니 대강 그런 뜻이었다. 아마도 그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약하다 일본군에 잡혀 총살당한 볼쉐비키를 기리기 위한
것인 듯했다. 흰 눈벌 위에 새빨간 피를 흩뿌리며 죽어간 젊은 혁명가
부부의 영상이 아직 술에서 덜 깬 내 감상을 자극한 탓일까, 그 바람에
객실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은 1920년을 전후한 항일 빨치산 영웅들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나키스트 빨치산 대장
트리피친이었다. 1921년 트리피친은 겨울 혹한과 눈 속에 갇혀 있는
니콜라옙스크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소수를 포로로
잡았다. 개파리(개썰매) 말파리에 스키부대까지 동원된 시베리아 전통의
기동전이었던 모양인데 그들 중에는 고려인 유격대도 가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봄이 되어 아무르강 얼음이 풀리면 일본의 군함이
하바로프스크까지 올라올 수 있는 터라 그들의 잔인한 보복전이
두려웠다. 이에 트리피친은 자신이 지휘하던 빨치산들뿐만 아니라
협조적이었던 전 주민들을 데리고 흑하(블라고베첸스크)쪽으로 이동했다.
썰매와 도보로 이어진 것이라 넉 달이나 걸린 행군이었는데, 대장
트리피친은 도중에 만난 볼쉐비끼 군대에게 처형되고 말았다. 죄명은
반혁명에 명령 불복종. 강한 외적을 눈앞에 둔 채 가차없이 전개되는
이념투쟁도 섬뜩했지만, 화자의 아버지가 그때 트리피친과 함께 행군했던
고려인들 중에 하나여서 이야기가 더 생생하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뒤이어 혁명초기의 때묻지 않은 이상과 열정으로 제국주의 일본과 싸웠던
몇몇 볼쉐비키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우리 상식의 허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흔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요행으로 보고, 태평양 전쟁 직전에 이루어진 일소 불가침
조약도 일본 외교의 야바위 쯤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시베리아의
원동지방만 둘러봐도 일본이 러시아에게 얼마나 구체적이고 강력한
위협이었던지를 금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두 번째 날이 저물어 오고 기차는 벌써 동시베리아로 접어들고
있었다. 예니세이 강과 레나 강 사이, 면적은 남한의 마흔 배가 넘지만,
인구는 서울시에도 못 미치는 지역이다. 잠시 정차한 역의 이름을
지도에서 찾아보다가, 차창으로나마 눈 여겨 돌아보고 싶던
하바로프스크를 이미 오래 전에 지나쳤음을 알았다.

하바로프스크는 그 도시를 건설에 공이 큰 탐험대장 하바로프의 이름을
딴 도시로, 한말 이후 우리와도 많은 연관을 맺어왔다. 특히 해방 때까지
소련군에 소속된 김일성 부대가 머물렀던 곳으로 지금의 북한 정권을
난감하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백두산 밀영에서 났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출생기록이 김 유라라는 이름으로 그곳 행정관청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날은 줄곧 책읽기로 때웠다.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빨리
마비가 오는 것은 후각이고, 시각은 비교적 지구력이 있는 편으로
들었다. 하지만 시각의 수용능력도 이틀 정도가 한계인 성싶었다.
첫날에는 그렇게도 감동스러웠던 풍경들이 차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잘 생긴 적송숲이 눈 덮인 벌판 위에 이채를 띄어도 감탄사보다는
"또" 혹은 "아직도"라는 말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시각이 다시 그 예민한 감수성을 회복한 것은 쇠로 된 낙타 등위에서의
기거가 지루하고 답답해지기 시작한 세 번째 밤을 지새운 뒤였다.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뒤 추운 끽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동행이 알려주었다. "바이칼 호가 시작된답니다"

(이문열ㆍ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