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평생토록 서울을 가슴팍에 달고 다닌다. 사내 아이
성명 석자 중에 한 글자의 작명권을 가진 조부는 여섯 번째 손자에게
'서울 경'(京)자를 선사했다. '벼슬하지 말라!' 다소 좀스런 가훈을
물리면서 누대에 걸쳐 큰 농사와 짧은 글읽기로 난세를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가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바뀜을 끝내 외면할 수는 없었던지
살림꾼 맏이를 빼고 네 아들 모두 일본 유학을 내보낸 조부였으니 손자도
하나쯤 옛 임금의 땅에서 입신하라는 염원을 품었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딱히 고를 글자가 마땅치 않아 그저 편하게 찍었는지도 모른다.
십 몇 촌 이내에는 동명이 허용되지 않았고 내가 태어날 당시 웬만큼
괜찮은 자는 무수한 몇 겹 종형(從兄)들에 의해 이미 선점당한 터였으니
말이다.

피난과 수복, 그리고 낙향으로 뒤범벅이 된 유소년 기간 내내 나는 내
이름의 고향을 그리면서 살았다. 난리 통에 풍비박산이 된 가족, 졸지에
'시골 소년'이 되어버린 나는 흐릿한 기억 속 세일러복의 치과집
딸아이를 그리며 야산 철쭉을 꺾었다. 그 소녀가 한번쯤 '윤초시
증손녀'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설레임에 밤 별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재입성하기 전에 딱 한 번, 새참 나들이를 했다.
종로였다. 수문장격인 화신백화점에서 산뜻한 '신생 교복'을 맞추어
입은 여학생이 종로서적에 들러 학생잡지 '학원'을 사는 종로였다.
'차라리 헤어지자, 종로 네거리' 유행가 가사대로 애틋한 연인들의
사연도 유랑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수줍은 지갑을 열어 참고서 한 권을
샀다. 내가 유배생활을 하던 소읍 배다리의 헌책방
'형설(螢雪)문고'와는 실로 천양지차였다. 지천으로 누르는
새책더미에서 은은한 향내마저 감돌았다.

책방 문을 나서면 온통 간판 투성이였다. '뉴욕제과' '파리제과',
'독일빵집', 종로는 적어도 이름으로는 이 땅에 홍수처럼 밀어닥친
서양문물의 전시장이다. 연조 깊은 '고려당'에 후발주자인
'복떡방'이 안쓰럽게 편식의 위험에 계고장을 보낼 뿐이다.
'馬利書肆' 김수영의 비아냥대로 한 세대 앞서 '똥 폼 잡던'
박인환의 모더니즘의 유희가 스친 곳이다.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의
'리버티 뉴스'를 통해 민주주의와 자유의 정신을 공급받았던 종로였다.
박래(舶來)의 지성과 양식은 곧바로 이 땅 청년의 학문과 사상의
자양분이었다.

그 종로에 우뚝 서서 이 땅 청년의 자주와 자존을 배양하던 종로서적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월드컵 첫 승리!' 하필이면 48년만에 민족의
염원을 이룩하여 새 역사를 창조했다는 바로 그날 접한 참혹한 소식이다.
그러나 종로서적의 죽음은 어쩌면 현충일의 사이렌보다 장엄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弔鐘)인지도 모른다.

'붉은 악마' 군단의 활보는 피의 냄새가 물신거리는 이 땅에 적색
공포를 말끔히 청산해 주었다. 전국민이 붉은 악마가 된 것은 어쩌면
문자를 매개체로 하던 사색의 시대를 뒤로하고 현란한 시각과 행동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그 종소리가, 그 신호가
무섭다. 군데 군데 한자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자유의 시인'
김수영도, '5월 광주의 시인' 황지우의 시도 읽어내지 못하는 이 땅의
문학지망생, 원서 대신 '번역서'만을 찾는 영문학도, 마치 성전을
치르는 사명감으로 점거한 총장실에서 밤새 희희닥거리며 성인영화를
트는 철없는 학생들이 남긴 너무나도 비천한 낙서 구호, 이 모든 것들이
종로서적의 사망선고와 무관한 것일까?

안할말로 그까짓 축구공이 어느 골대로 몇 번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랴,
마치 '쪽집게 과외' 하듯이 외국인 교사의 고액 단기완성 작전이
성공하여 월드컵 16강의 꿈을 이룬다고 해서 정녕 이 나라의 장래가
밝아지는가? 불과 1년반 전까지 광화문 대형서점 입구에 전시된
역대노벨상 수상자 명단의 말미에 처절한 기도문처럼 걸려있던, 빈
액자속의 '장래의 한국의 수상자' 문구대로 마침내 노벨상을 얻은
우리다. 그 소원을 이루고 나서 나라가 밝아졌는가? 대표팀의 승리에,
히딩크의 기여에 전국민과 함께 눈물로 환호하면서도 무언가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할 것 같은 무거운 책임감이 든다.

(안경환·서울법대 학장·한국헌법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