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김연경 소설/ 문학과지성사/ 7000원)


실험적이 아니면 소설이 아니다. 실험적인 것이 아니면 그저 소문이거나
풍문이거나 이도저도 아니다. 김연경(28)은 이런 식으로 말을 건다. 이
소설은, '자살을 하고자 하는 어떤 한심한 놈이 있었고, 그놈이 게나
고둥이나 다 하는 연애를 시작했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고,
결혼 이후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고, 아이가 죽었다'(138쪽)는 얘기를 한
심리 상담자에게 전화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어떤 한심한 놈'은 대학을 졸업하고 일곱 번 이상 취직시험에
떨어져 자살을 수도 없이 시도하는 가운데 소설(속소설)을 습작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소설(겉소설)이 '실험적'이 되는 것은, 이중의
액자 구조가 연쇄고리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것 말고도, 1996년9월부터
2002년9월에 이르는 6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이 철저하게 비인칭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는 통성화된, 혹은 중성화된
3인칭만이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3인칭이 될 수
있는 1인칭과 2인칭만이.'(9쪽)

"합리성 따윈 없고, 오직 불가피성에의 인식과 수용만 있을 뿐"이라는
작가의 선언처럼, 작의(作意)의 앞뒤가 의도적으로 전도된 듯 보이는
구조 속에서 환각과 이미지의 부유,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 아니
그보다 더 서슬푸를 경계의 '날(刃)' 위에 우리의 작가는 맨발로 선다.
주인공으로 환유된 작가 자신은 등단 초창기에 겪는 통과의례일, 소설에
대한 회의(懷疑)와 환멸이 생명까지 방치할만큼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마침내 '90매짜리' 소설을 청탁 받았을 때 엄습했던 '짧음',
'거짓말', '연애' 같은 단상(短想)은 속소설과 겉소설의 작가들
모두에게 그 능욕과 통속 앞에서 숙연한 묵념을 하게 만든다.(78쪽) 소설
말미에 주인공이 '죽은 나'와 '그 죽은 나를 바라보는 나'로
쪼개지는 경험은, 극단적으로 엽기스럽기에 오히려 소설적인, 저 유명한
유체이탈 증세가 얼마나 끈질지게 젊은 소설가를 괴롭혔는가 드러내
준다.

소설론이나 작가론 자체가 소설적 글쓰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실제로 소설 내부에 일어나는 실험적 작동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 작가가 소설 지문 속에 자기자신을 하나의 포즈로 드러내는 일은
재래식 문체론을 무망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하고픈 분들께 이 소설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