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1907-1954)는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에 멕시코시티 교외의 작은 시골,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서 태어났다. 사진사였던 유대계 독일인인 아버지와 멕시코 원주민 메스티조인 어머니 사이에서 여섯 명의 딸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는데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리다는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 쪽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이후 유난히 가는 그녀의 다리는 평생 기다란 스커트만을 입고 다니게 되는 외적인 열등감의 원인이 되었다. 명문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던 그녀는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고 방과 후 아버지의 사진관에서 일을 도우며 사진기술을 배우는 등 예술적인 소양도 길렀다.

〈상처 입은 사슴〉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46년, 섬유판에 유채, 22.4x30㎝, 개인 소장

그러나 그녀가 한창 꿈 많은 소녀시절인 열여덟 살 때 하교 길에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로 인하여 그녀의 삶은 이후 평생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연속이 되었다. 그 후유증과 고통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승객용 손잡이가 달려 있던 쇠파이프가 그녀의 몸 전체를 관통했다. 파이프는 가슴과 척추, 골반, 자궁을 관통했고 어깨와 다리, 발 등의 뼈들이 으스러졌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침대에 누워 석고 틀 속에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내야 했다. 이때 가족들이 무료한 그녀를 위해 천장에 거울을 달아 주고, 침대에 이젤을 부착해 주어 하루 종일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첫 번째 자화상을 완성하게 된다.

이후 프리다는 외출을 하기보다는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고 강철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살아갔지만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멕시코 혁명 이후 낡은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새롭게 모든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대중을 위한 벽화예술운동이 멕시코에서 유행을 했다. 이때 공산주의 활동에도 참가한 그녀는 ‘멕시코 르네상스’를 이끈 벽화예술운동의 선구자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혹자는 프리다의 평생에 걸친 시련 중 가장 큰 것이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이라고 하기도 한다. 스물 두 살의 프리다가 많은 나이차, 화려한 여성편력, 방탕한 생활로 유명한 마흔 세 살의 디에고와 운명적인 사랑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미 거장이었던 디에고와의 결합은 스승, 선배, 동료 예술가로서의 존경과 사랑, 그의 배신으로 인한 고통이 함께 하였지만 더욱 치열한 삶 속에서 그녀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인정받았는데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이 아닌 멕시코의 정체성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멕시코 전통의상과 장신구를 고집하였다. 멕시코의 정체성 확립에 힘썼음에도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여 공산주의자, 자유연애주의자, 양성애자로 살면서 세간의 이목을 받았던 그녀는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여겨졌다.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경희대 강사

〈상처입은 사슴〉은 그녀가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의 그녀는 상처받은 영혼을 암시하듯 여러 개의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으며 그녀의 고통스런 현실은 부러진 나뭇가지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만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내뿜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것을 암시하듯 그녀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후 그녀의 말년은 오른발이 썩어가 발가락과 오른쪽 다리 무릎아래를 절단하고 그녀의 개인전 개막식에는 침대에 실려 참석하는 등 더욱 힘들어져 갔다. 고통 속에서 자실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녀는 마흔 일곱 살에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일기장에 ‘행복한 퇴장이 되기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적어 놓았던 프리다.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던 그녀는 다수의 미완성 작품이 말해 주듯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