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에서 이맘때쯤 논에서 모내기를 할 때는 그 일꾼들에게 삭힌 홍어를 먹이는 것이 관례였다. 10kg짜리 홍어 1마리는 30~40인분이 나온다.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홍어를 발효시켜서 먹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추적하다 보면 뜻밖에도 왜구 침입과 관련된다.

우리나라 홍어의 주산지는 흑산도이다. 흑산도 근해에서 잡히는 홍어 맛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이 흑산도 일대의 섬들이 고려 말에 빈번하게 왜구들에 노략질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 일대의 섬에 사는 주민들을 육지로 소개시켜, 섬 전체를 텅 비게 만드는 정책이었다. 공도정책에 따라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羅州)에 많이 정착하였다. 나주의 ‘영산포’는 흑산도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배를 대던 포구(浦口)였고, 바로 이 영산포에 흑산도를 비롯한 섬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고 한다. 몇 년 여기서 살다가 왜구들이 잠잠해지면 다시 흑산도로 돌아가곤 하였다.

옛날에 흑산도에서 나주의 영산포까지 풍선(風船)을 타고 들어오는 데에는 보통 10~15일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흑산도 사람들이 홍어를 잡아서 배에다 싣고 나주 영산포까지 오는 동안에 홍어가 싱싱할 리 없다. 배에 냉동시설이 없던 시대이니까 약 열흘이면 자연발효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렇게 해서 삭힌 홍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영산포라는 이름도 이와 관련 있다. 흑산도 바로 옆에는 영산홍이 많이 피는 섬이라고 해서 ‘영산도’라고 불리던 조그만 섬이 있었다. 흑산도와 영산도 사람들이 나주에 와 타향살이하면서 영산홍이 피던 고향 영산도 생각이 간절하였고, 이 때문에 포구 이름도 아예 ‘영산포’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영산포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섬사람들이 고기를 잡아서 영산강을 타고 내륙의 곡창지대인 나주까지 들어와 곡식과 맞바꾸는 시장이기도 하였다.

이번에 한국방송대 이영 교수가 왜구들을 연구한 책(‘잊혀진 전쟁 왜구’)을 펴냈다. 고려 말 흑산도에 침입한 왜구들은 규슈 지방의 토호세력인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 휘하의 사무라이 집단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