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레니나(Lenina), 니넬(Ninel) 등의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레니나는 레닌의 여성형, 니넬은 레닌의 철자를 거꾸로 부른 이름이다. 남자 아이에게는 블라딜렌(Vladilen)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곤 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약어인 셈이다. 유대인 아이들이 모세라는 이름을 흔히 갖듯이, 소련의 아이들은 러시아 인민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공산주의의 모세인 레닌의 이름을 가졌다.

공산주의의 종교적 특성에 주목한 것은 물론 마르친 쿨라(Marcin Kula)가 처음은 아니다. 저자도 인용하듯이, 사회학자 오소프스키(Ossowski)는 1956년 일기장에 “사회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신정국가의 신의 독재의 근대화된 형태”라고 조심스럽게 썼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폴란드의 신학자 티쉬네르(Tischner) 신부는 “공산주의는 종교의 적대자일 뿐만 아니라 캐리커처이자 패러디였다”고 선언했다.

무신론을 외치는 공산주의와 종교는 서로 적이라는 상식을 한 꺼풀 벗겨보면, 닮은 점이 의외로 많다. 공산주의 역사철학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마니교적 비전을 담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라는 세속적 사탄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위대한 수령의 영도 아래 낙원을 향해가는 고난의 행군의 역사인 공산당 약사는 동족을 끌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에 정착한 모세의 이야기와 닮았다. 결국 공산당 약사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같은 플롯 위에 서 있다.

▲ 1999년 쿠바 아바나에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 기념비 앞에서 청년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다.

교회와 당은 계시된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의 유일하고 정당한 수호자이다. 교회와 당은 모두 밖의 이교도보다는 내부의 이단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 트로츠키 주의와 수정주의를 비롯한 무수한 이단적 ‘주의’들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를 떠올리게 한다. 이단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받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것이다. 모스크바는 공산주의의 로마였으며, 크레믈린은 세속의 바티칸이었다.

당 조직은 수도원과 유사하다. 교회법에 대한 순종, 엄격한 규율, 완전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수도원의 조직은 당 조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들은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굳건한 ‘형제애’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들 공동체는 개인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대신, 의식주에서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

가톨릭의 역사 못지않게 공산주의의 역사 또한 많은 ‘성인’들을 낳았다. 이 성인들은 죽어서도 당과 인민에 봉사한다. 평양의 혁명 열사릉이나 크레믈린의 담장 밑에 묻힌 죽은 자들이 산 자를 인도한다. 붉은 광장의 ‘영묘’ 속에 누워있는 레닌의 시신을 필두로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 프라하의 고트발트, 하노이의 호치민, 베이징의 마오쩌둥, 평양의 김일성 등 방부 처리된 ‘성인’의 시신들은 부패한 가톨릭 성인들의 유해보다 기술적으로 근대화되었을 뿐, 기본 정신은 같다.

모로조프, 스타하노프, 레이펑 등의 각종 사회주의 영웅들은 바로 이들 사회주의 성인 따라잡기의 결과이다. 1980년대에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널리 읽힌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중세 성인전의 사회주의 버전이며, 그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 및 순교자 명부 등재 요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인민들에 대해 체제에 대한 순응과 동의를 넘어서 그들의 영혼까지 지배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 권력은 교회 못지 않게 많은 성인들을 필요로 했다.

공산주의는 사실상 ‘호모 소비에티쿠스’ 혹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인간혁명’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기적이고 원자화된 개인을 혁명과 공동체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은 각 개인의 실존적 근거까지 근원적으로 바꾸는 ‘개종’ 작업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인간혁명’의 프로젝트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쳐 그 원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자신이 직접 겪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한다. 매년 레닌의 기일마다 연구소와 문화 관련 국가기관을 다니며 그 안에 놓인 레닌 흉상에 꽃다발을 바치고 가는 문화부 고위 공무원이 있었다. 그는 저자가 근무하던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건물 안의 레닌 흉상에도 어김없이 꽃다발을 바치곤 했는데, 소장 비서는 그가 나가자마자 늘 그 꽃다발을 소장실의 화병에 꽂아버렸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자가 되지 못한 관료들이 남에게 성인처럼 굴기를 설득하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었을까?

흥미진진한 분석과 유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전근대적 동유럽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종교를 닮게 됐다는 저자의 결론은 다소 아쉽다. 민족, 조국, 국가, 계급 등의 세속적 실재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의 신성화’ 혹은 ‘정치종교’는 그 자체로 이미 근대성의 산물인 것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에서 ‘탈주술화’와 ‘재주술화’를 동시에 읽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근대적 합리주의가 정교분리에서 보듯이 전통종교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박탈했지만, 근대야말로 새로운 유형의 세속적 종교성이 만들어지는 온상인 것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쟈코뱅이 공화주의 사상에 입각해 정교분리를 외치면서 국가교회였던 팡테온을 혁명열사와 민족 영웅의 성스러운 묘역으로 만들었을 때, 이미 정치종교는 근대적 헤게모니적 지배장치로서 꿈틀대고 있었다. 주기도문을 그대로 패러디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 총통을 위한 기도문이나 종교를 닮은 공산주의는 모두 근대 권력의 무한한 지배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내용을 조금 바꾸더라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21세기 남한사회에서 스스로 종교가 되고자 하는 근대 권력의 욕망은 얼마나 큰 것일까? 나라 사랑의 표현인 우리의 ‘국민의례’는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의 정치종교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