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10일, 영국 기자 닐 부어맨(Neil Boorman·31)이 중대 결심을 했다. 자신이 한평생 세심하게 선택하고 수집해온 각종 브랜드 제품을 일시에 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비장한 결심이었다. 흡사 "술꾼이 술을 끊듯" "부랑자가 자기 거처에 오줌을 갈기듯" "불교 승려가 자신의 몸을 태워 소신 공양을 하듯" 부어맨은 여섯 달 뒤 런던 한복판에서 자기가 쓰던 브랜드 제품을 몽땅 불태워버리겠다고 공언했다. 소득과 취향과 소비 패턴에 따라 손쉽게 이런 저런 군(群)으로 분류되는 일개 '소비자'에서 순전히 자신의 덕과 재능과 개성으로 평가 받는 '인간'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이었다.

부어맨은 스스로를 "런던 교외에서 자란 영국 중하류층 백인 남자"라고 정의한다. 그가 어린 날을 보낸 1980년대는 마거릿 대처 총리 밑에서 영국이 번창하던 시절이다. 내핍(耐乏)에 익숙했던 영국 서민들이 너나 없이 더 큰 집을 사고, 차를 한 대 더 뽑고, 휴가철마다 해외 패키지 관광을 즐겼다. 그는 또한 Y세대다. 이들은 대략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또래 집단이다. 선데이 타임스지(紙)가 "역사상 가장 자기 중심적인 세대"라고 꼽은 집단이기도 하다.

부어맨은 한평생 이 같은 정체성에 충실히 부합해왔다. 그는 소시적부터 '잘 나가는 어린이'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초등학교 때는 "아디다스 축구공이 생기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겠나이다, 아멘" 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협상을 했다. 클럽 DJ로 일하면서 이런 저런 이벤트를 기획하다가 직접 잡지를 창간해서 편집장으로 뛰던 사회 초년병 시절, 그는 박봉을 털어 400파운드(80만원)짜리 루이비통 숄더백을 샀다. 이 가방은 그에게 성년과 성공의 상징이었다.

자신이 평생 사모은 브랜드 제품을 몽땅 태워버리고“브랜드 없이 살겠다”고 공언한 영국 저널리스트 닐 부어맨.

부어맨은 “나라는 사람은 실로 세심하게 선택한 브랜드들의 덩어리였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이런 저런 브랜드가 표방하는 이미지 대로 자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예컨대 그는 윤리 경영으로 이름난 은행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로 신문 값을 결재했다. 부어맨은 “내가 이 은행을 이용하면 은행 직원들이 나를 의식 있는 소비자라고 여긴다”고 으쓱거렸다. 그는 또 아디다스 운동화를 애용했다. 이 브랜드가 “자유 분방하고 세련되면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유럽 백인 젊은이의 자부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즐겨 썼다는 이유로 ‘몰스킨’ 다이어리를 쓰고, 창의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쓴다는 이유로 애플 ‘아이맥’ 컴퓨터를 사용했다.

그런 부어맨이 별안간 왜 ‘브랜드 화형식’을 거행하기로 결심 했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과 똑같은 브랜드로 온몸을 휘감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불안감과 불쾌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애초에 개성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브랜드 제품을 애용했으나, 그가 착용한 브랜드는 그를 ‘특정 제품을 걸친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로 격하시켰다.

부어맨은 나오미 클라인의 ‘노 로고’, 존 버거의 ‘사물을 보는 시각’ 같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중 존 버거의 일절을 인용해보자. “물건을 사고 돈을 쓸수록 그만큼 가난해질 뿐임에도 불구하고 광고는 우리가 무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풍족해질 거라고 얘기한다.” 자기 성찰에 발동이 걸리자, 부어맨은 브랜드 중독에 대한 심리 치료도 받았다.

화형식은 예정대로 거행됐다. 부어맨이 태워 없앤 물건의 목록은 예의 루이비통 숄더백을 필두로 입생로랑 재킷, 헬무트 랭 청바지, 비비안 웨스트우드 목걸이, 테크닉스 턴테이블 등 208종, 2만1345파운드(4100만원) 어치다. 활활 타는 화형대 앞에서 대중은 “대단한 결심”이라고 박수를 치거나 “위선 좀 작작 떨라”고 야유를 했다. 남이야 뭐라건 본인의 가슴은 찢어졌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통렬한 대목은 화형식을 벌인지 125일째 되는 날, 한 영국 잡지가 부어맨을 “소박함을 추구하는 양심적 문화와 함께 부상하게 될‘신 검소족’(Nu Austerity)의 선도자”로 꼽았다는 얘기다(308쪽). 부어맨은 “브랜드를 거부하고자 하는 나의 작은 몸짓조차 순식간에 특정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 도구로 전락했다”고 씁쓸해하면서도, “성공적인 소비자는 평범한 소비자를 뜻할 뿐”이라며 여생을 브랜드 제품 없이,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소비하며 보내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재확인한다.

냉소적인 독자들은 “그래서 뭐?” 하고 반문할 것이다. 화형식 이후 1년 남짓 지난 현재, 브랜드는 세계 어딜 가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렇다 해도 광고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이래 부어맨의 인생은 얼마간 호젓해졌다. 모르긴 해도 통장 잔고 역시 전보다 알찰 것이다.


◆더 읽을만한 책

브랜드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갖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 대해 더 읽고 싶은 독자들께 나오미 클라인의 '노로고'(원제 No Logo·중앙M&B), 제임스 트위첼의 '럭셔리 신드롬'(미래의 창), 라다 차다의 '럭스플로전'(가야북스), 김난도의 '럭셔리 코리아'(미래의 창)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