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우주의 아주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지동설은 17세기까지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위험천만한 사상이었다.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기독교가 자신의 교리의 정당성을 천동설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사적으로 볼 때 천동설은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이론이었다. 천동설은 기독교가 발생하기 전인 기원후 1세기경,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aeos·85~165)가 만들어낸 우주 운동의 원리였다. 그가 자신의 천동설 이론을 집대성해 쓴 책은 사후에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뜻으로 불리 우면서 신성시됐다.

중세 초기 서구 사회를 지배한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학문적 토대가 필요했고,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인간중심적인 기독교 사상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주 전체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그러면 인간의 위대성과 더 나아가 이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성이 더욱 강조되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천동설은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와 함께 천년 이상 절대적 진리로 군림해왔다.

당시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일은 당연히 이단으로 몰릴 만큼 위험했다. 그러나 역사에는 '권력'에 순응하기보다는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지동설 역시 이런 용기 있는 네 명의 과학자 겸 성직자에 의해 이루어진 과학이론이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1473~1543)이다. 그가 살던 당시 사람들은 교회가 사용하는 교회력(敎會曆)과 항해에서 사용하는 항해력을 사용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천동설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교회력이 사용하고 있는 율리우스력(Julian Calender)은 실제의 춘분(春分)과 율리우스력에 따른 춘분이 일치하지 않아서 종교적 제례일(祭禮日)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항해력은 천동설을 근거로 계산한 천체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항해에 심각한 위협을 미친다는 점이 문제였다. 대학에서 수학, 철학, 그리스어, 천문학을 배운 성직자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천동설 보다는 지동설을 전제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지동설이 천문학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 더 간단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주어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으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선한 발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코페르니쿠스는 무척 소심했다고 한다. 10살에 아버지를 여윈 그는 신부인 외삼촌의 보호 아래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천문학 등을 배우며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그에게 교회는 절대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최신의 학문을 배운 과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보다 지동설이 더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과학자로서의 진리와 성직자로서의 믿음 사이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소심한 그는 성직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1525년과 1530년 사이에 자신의 이론을 집필한 4권짜리 책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 그랬다면 지동설이라는 과학이론은 훨씬 더 늦게 세상에 나오게 됐을 것이다. 다행히도 코페르니쿠스에게는 독일 출신의 젊은 수학자인 레티쿠스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승이 쓴 책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는 제자의 간청에 못 이겨 출판을 결심한다.

책의 출판 과정에서도 코페르니쿠스의 소심함은 잘 나타난다. 그는 책의 첫 표지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이론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이론적 관점에서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안이다"라는 커다란 문구를 첨가했으며 이와 더불어 자신의 죽음이 가까울 무렵인 1542년에서야 겨우 출판을 허락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24일, 임종하는 자리에서 책의 인쇄 견본을 받아볼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소심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책 내용을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없게 의도적으로 어렵게 썼다고 한다. 당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성직자나 귀족뿐이었는데, 거기에 덧붙여 가장 복잡한 수학까지 첨가한 그의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교회의 뜻과 크게 위배되는 책이 출판됐음에도 사회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책 내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이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지 50여 년 뒤, 그 책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내용을 이해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수도사 브루노(G. Bruno·1548~1600)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한층 발전시켜 발표한 브루노는 진리를 밝히기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침상에서 편안히 임종을 맞은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브루노는 종교재판에 회부돼 화형 당하는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