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6월 22일은 69세인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이단 혐의로 기소돼 로마에서 종교 재판을 받은 날이었다. 당시 10명의 추기경이 재판관 자격으로 참석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육체는 거기에 없으나 정신은 그곳에 입회'하고 있었다. 갈릴레이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신체적 상태가 불쌍할 지경(당시 갈릴레오는 거의 실명의 위기에 있었다)이며, '진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회개했다. 이렇게 지동설을 부인한 덕분에 간신히 화형을 면했지만,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며 3년 동안 매일 7대 회개 시편을 외워야만 했다.

종교재판을 받는 갈릴레이

말년은 불행했으나 163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갈릴레이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과학자였다. 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피사에서 중류층인 음악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피사 대학과 피렌체에서 의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1589년에 피사 대학의 수학 강사가 됐다. 그 후 베네치아공화국(북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관성의 법칙을 발견했다. 1610년에는 피렌체 공국 코시모 2세의 초청을 받아 궁정 천문학자이자 철학자가 됐다. 당시 갈릴레이의 잘생긴 외모와 총명함 그리고 탁월한 언변 때문에 추기경이나 귀족들은 서로 그를 초대해 강연을 들으려 했다고 한다.

이런 갈릴레이의 인기에는 교황과의 친밀한 관계도 한 몫을 했다. 갈릴레이와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같은 지방 출신이고 같은 대학에서 각각 의학과 법학을 공부하며 우정을 쌓았다. 1616년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며 교황청과 대립하고 있었을 때, 당시 추기경이었던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이를 위해 자청해서 중재를 했다고 한다. 또 지동설을 단지 가설로만 연구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하기도 했다. 1623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갈릴레이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며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갈릴레이가 교황의 믿음을 배반하고 지동설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큰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지동설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갈릴레이와 동시대에 살았던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스승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가 20년간 행성의 위치에 대해 관측한 자료를 바탕으로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밝혀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교황청이라고 하더라도 지동설에 대한 연구를 전면적으로 금지시킬 수만은 없었다. 결국 교황청에는 "지동설을 학문의 주제로 삼아 연구하는 것까지는 인정하겠지만, 실제 우주의 모습이 지동설이라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엄단하겠다"는 최종 타협안을 내놨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우주의 실제 모습이라고 확신했다. 1609년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망원경이 발명됐는데, 갈릴레이는 36배나 배율이 좋은 망원경을 직접 제작해 천체를 관측했다. 이를 통해 달의 표면이 고르지 않다는 것과 목성의 위성들과 금성의 위상 변화를 관찰했으며 이를 통해 지동설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1632년에 '천문대화(원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를 집필한다. 이 책은 살비아티, 사그레도, 심플리초라는 세 명의 인물들이 살비아티의 웅장한 저택에서 4일 동안 나눈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희곡의 형식을 띠면서 어려운 라틴어가 아닌 쉬운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천문대화'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됐고, 교황청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갈릴레이가 특히 교황의 분노를 사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감정도 작용했다. '천문대화'에서 심플리초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아둔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는 교황을 암시했다. 이에 반해 지동설을 주장하는 멋있고 지적인 살비아티는 갈릴레이였다. 갈릴레이를 친구로 생각했던 교황의 입장에서 보자면 갈릴레이의 책은 교황권을 침해하고 더불어 자신의 우정을 배신하는 행위로도 비춰졌을 것이다. 교황은 격노했고, 갈릴레이가 죽은 후에도 교황의 화는 풀리지 않아서 갈릴레이의 시신은 적절한 장례도 치루지 못했다. 그러나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옳은 것은 갈릴레이였다. 가톨릭은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 사과를 해야만 했고, 이는 1992년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렇게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과 함께 권력에 맞선 혁명적인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갈릴레이는 알려진 것보다는 덜 혁명적인 사람이었다. 우선 이런 멋진 말을 갈릴레이가 실제로 했다는 역사적 증거도 없을뿐더러, 동시대 사람인 케플러가 주장한 행성의 타원 운동도 갈릴레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성서에 행성들이 원운동을 한다고 쓰여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종교 재판 7년 후인 1640년에 실명 상태와 가택연금 상태에서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도 "오직 성서와 신만이 우주가 유한한가 무한한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며 가톨릭에 대한 여전한 충성심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갈릴레이의 생애는 르네상스기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를 보여주며, 구시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그의 삶에 공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