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워싱턴 특파원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 시나이 반도의 에치온 공군기지에서 14대의 공군기가 이라크를 향해 출격했다. F-16 8대, F-15 6대로 이뤄진 이스라엘 공군기 편대는 1000㎞를 날아 이라크 바그다드의 동남방 25㎞에 위치한 오시락(Osiraq) 원자로 부근에서 '바빌론 작전'을 개시했다.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작전이 시작된 지 2분 만에 16발의 폭탄을 퍼부어 오시락 원자로를 폭파시켰다. 이스라엘은 1980년 오시락 원자로에 대한 1차 공격 실패 후 이와 똑같은 모형물을 만들어 비밀 폭격 훈련을 실시한 결과 2차 공격에 성공했다.

이로부터 26년 뒤인 지난해 9월 6일 이스라엘은 시리아를 향해 공군기 편대를 띄웠다. 시리아가 영변 원자로를 성공리에 가동시킨 북한의 도움으로 핵 시설을 만들고 있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이 비밀리에 추진한 작전이었다. 이 공격으로 시리아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티브나 지역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알 키바르(Al Kibar)의 '핵 관련 시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국제정치학에는 흔히 핵 시설을 무력화한 사례로 상반된 두 가지가 거론된다. 정치·경제적 지원을 해 주고 핵 시설을 성공리에 해체시킨 우크라이나 모델과 무력에 의해 핵 시설을 폭파시킨 오시락 모델이다. 이스라엘은 오시락 모델에 지난해 시리아의 핵 의혹 시설을 선제폭격에 의해 없애버린 '알 키바르 모델'을 추가시켰다.

이스라엘이 두 차례에 걸쳐 무력으로 핵 개발을 저지시킨 사례는 북한의 핵 개발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봐 온 우리에겐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1973년부터 30년간 미국 해외원조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미국의 입김이 강한 이스라엘이지만 핵 무기와 관련된 안보 문제에 대해선 독자적인 판단을 내렸다. 미국은 1981년 오시락 폭격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난해에도 이스라엘의 시리아 폭격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콘돌리자 라이스(Rice)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 관리들이 대거 나섰지만 끝내 이스라엘의 결단을 막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이런 단호함은 미국에서도 골칫거리다. 미 행정부에는 이스라엘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관련규정을 지키지 않으며 '모험주의'를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관리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에는 시카고대의 존 미어샤이머(Mearsheimer) 교수와 하버드대의 스티븐 월트(Walt) 교수가 '이스라엘 로비와 미국의 외교정책' 출간을 통해 미국의 친(親) 이스라엘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핵 무장 국가가 된 후 주변국의 핵 무장 추진을 용납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무서울 정도의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시락 모델이나 알 키바르 모델이 곧장 한반도의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사실상의 핵 보유국가가 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론은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움직이는 리더십과 그 결정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결집력 연구까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특히 2006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핵 실험 이후에도 별다른 책임을 묻지 못하고 레드라인(Red Line·금지선)을 자꾸만 후퇴시켜 온 대북(對北) 협상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