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의 33만578㎡ 대지(여의도 전체 면적의 12.5%)에 자리 잡은 국회의사당. 국회의원 299명과 수천명의 보좌관과 비서 및 국회직원 등이 일하는 곳이다.

◆중앙청→피란→태평로 시절

국회의사당은 여의도에 자리 잡기 전까지 떠돌이 신세였다. 1948년 제헌국회 첫 회의는 옛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열렸다. 이곳은 그 후 2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6·25전쟁 때는 국회도 피란을 떠나 대구 문화극장, 부산 문화극장, 경남도청 내 무덕전 등을 전전했다. 1954년~1975년까지 22년간은 서울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현 서울시의회)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다. 3선 개헌, 유신헌법 등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여의도 이전

1966년 "의사당이 좁아 국회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며 국회의사당 건립위가 만들어졌다. 서울 사직공원, 종묘, 남산, 신문로의 옛 서울고 부지 등 10여 곳이 후보지로 검토됐다. 이 중 남산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됐으나, 이곳은 청와대가 내려다 보인다며 권력 핵심부에서 '불가' 방침을 하달, 여의도로 최종 결정됐다는 설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1968년 "통일을 대비하려면 큰 땅이 적합하다"며 여의도로 확정됐다. 당시 여의도에는 미군 비행장과 땅콩 밭이 있었다. 1969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1975년 끝났고, 135억원이 투입됐다. 135억원은 1975년 국가 예산의 1%였다. 국회 김종해 자료조사관은 "현재 예산(257조원) 규모로 보면, 2조5700억원이 투입된 대역사(大役事)"라고 말했다.

국회의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의원회관은 1968년까지는 없었고 의원들이 사비(私費)로 사무실을 임차해 사용했다. 그러나 1968년부터 예산이 배정돼 태평로 의사당 시절에는 세운상가 내 신성상가 6~10층을, 여의도 의사당 때는 1989년 의원회관 건립 전까지 KBS 연구동을 의원회관으로 사용했다.

◆돌과의 싸움

여의도 의사당 공사는 당시 건설업계 쌍벽이던 현대건설대림산업이 참여했다. 두 회사는 중동건설 붐 때 현지 발주처가 시공능력을 무시하면, 자신들이 지은 국회의사당을 보여주기도 했다. 의사당 건설에는 원래 외국산 자재 구입을 위해 200만 달러의 외자(外資)를 쓰려 했지만, "우리 기술과 힘으로 하자"며 외자 도입을 사양했다.

국회의사당은 화강석 4만3000㎡, 대리석 2만7000㎡가 들어간 '돌과의 싸움'이었다. 당시 전국을 뒤져 어렵게 찾은 석공 250여명이 공사를 시작했지만, 완공 무렵에는 프로급 석공이 2000여명으로 늘었다. 국회 사무처는 "공사 현장이 석공 양성소였다"고 했다. 24개의 거대 석조 기둥은 24절기, 24시간을 상징하며, 이 석조기술은 이후 세종문화회관, KBS 건물 공사에도 사용됐다.

◆파란 돔(dome)의 비밀

국회의 상징이 된 파란색 돔(지름 64m, 1000t)은 당초 설계에는 없었다. 설계자들은 '한국적 조형미'를 추구했지만, 정치인들은 '권위와 위엄'을 원했다. 그래서 나온 게 돔이었다. 서복경 전 국회 입법조사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 하와이 주(州) 의회 의사당에 반해 돔을 지시했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국회 관계자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이 천주교 신자여서 바티칸 양식을 원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돔을 올렸지만, 동판이 붉은색을 띠자 당시 국회 고위관계자는 "청동인데 왜 붉은색이냐"며 공사 관계자들을 다그쳤다. 현장 관계자들은 "청동을 빨리 부식(腐蝕)시켜야 푸른색이 된다"며 돔에 집단으로 소변을 봤다. 이 덕분(?)인지 돔은 두 달 만에 현재의 푸른색을 띠게 됐다. 그러나 일부 무속을 믿는 국회의원들은 "의사당을 위에서 보면 돔 때문에 상여 같아서, 처녀 귀신이 나타난다"며 돔 철거를 요구했고, 한때 철거하고 기와지붕으로 대체하는 것도 논의됐다. 그러나 예산 낭비 지적과 "돔은 이미 국회의 상징이 됐다"는 반론도 많아 철거 논의는 유야무야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