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조선 침략의 사전 답사 목적으로 조선을 정탐한 혼마 규스케(本間久介)는 1894년부터 '이륙신보(二六新報)'에 '조선잡기(朝鮮雜記)'를 연재했다. 최근 번역된 '조선잡기'의 언문과 이두에서 그는 한글에 대해 '교묘한 것이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면서 이런 문자를 가지고 "왜 고생스럽게 일상의 서간문에까지 어려운 한문을 사용하는가"라면서 한글은 중류 이하에서만 사용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이두(吏讀)에 대해서도 "조선 사람은 지금 이것(이두)을 사용하여 언문의 편리함을 모르는 자가 많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사대근성의 표상인가'라고까지 말하지만 이런 언어습관이 조선의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세종실록'은 훈민정음에 대해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본국의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다"고 썼는데, 문자는 한자(漢字)를, 이어는 이두를 뜻한다. '바른 음'이라는 뜻의 정음(正音)이 말해주듯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목적은 표의문자인 한자 대체(代替)가 아니라 표음문자인 정음과의 공존에 있었다. 세종은 재위 29년(1447)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신숙주(申叔舟)가 쓴 서문이 "훈민정음이 제작되면서 만고(萬古)의 한 소리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음(音)을 전하는 중심줄〔樞紐〕"이라고 주로 표음부분에 치중해서 설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학문과 정치의 독점을 위해 한자를 계속 전용하고, 중인 이서(吏胥)들도 중간관리자의 지위를 배타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이두를 전용하면서 세종의 표의·표음문자 공존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한글은 아녀자와 상민(常民)의 글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남교육청에서 초등학생들에게 한자 교육을 실시한다는데 세종이 실패했던 표의·표음 공존의 언어정책이 되살아나는 셈이다. 한자는 굳이 동이족 국가였던 은(殷)나라에서 만든 것을 강조하지 않아도 중국만의 글자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보편적 글자였다. 더욱이 현재 우리말의 순결성을 위협하는 것은 영어지 한자가 아니다. 한자 교육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