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金就礪·1172년~1234년)는 고려 고종 때의 무신으로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친 대장군이면서 시중(侍中·조선의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겸손 검소 정직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 김선(金鐥)을 뿌리로 하는 언양 김씨로 김취려가 시중이 됨으로써 고려의 대표적인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어 김취려의 아들 김전(金佺)도 문하시랑 평장사에 오른다. 평장사는 조선시대 의정부의 찬성(종1품)이나 참찬(정2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김전에게는 김양감 김군 김중 김보 김병 다섯 아들이 있었다. 그 중 김병은 문과에 급제해 충렬왕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인질로 갈 때 배행해 공을 세웠고 종1품 판삼사사(判三司事)에까지 올랐다. '고려사'가 '성품이 순후하고 소박하였으며 국가 사업을 받들어 진행함에 있어 항상 정직하게 하였으므로 능히 자기 가문의 유풍을 계승하였다'고 평하고 있는 김병 또한 언양 김씨 집안이 왕실과 가까워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전의 장남 김양감(金良鑑)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출세한 인물은 아닌 듯 한데 그 딸이 절세미인이었다. '고려사' 충렬왕 23년(1297년) 8월 '세자(충선왕)가 죽은 진사 최문(崔文)의 처 김씨의 자태와 용모가 아름다웠으므로 그를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에 등장하는 젊은 과부 김씨가 바로 김양감의 딸이다.

그 전달에 세자는 아버지 충렬왕이 무비(無比)라는 궁녀에 빠져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쿠빌라이의 딸)를 홀대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해 무비를 비롯해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환관들을 죽여버린 일이 있었다. 즉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무비를 대신해 미모의 김씨를 헌상했던 것이다.

내친 김에 세자는 이듬해(1298년) 정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지만 원나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7개월 만에 다시 왕위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원나라로 소환당한다. 1307년 원나라 성종이 죽고 권력 투쟁 끝에 무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충선왕은 무종편에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원나라의 명에 따라 충렬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오른다.

7월에는 충렬왕이 세상을 떠났다. 아직 상중(喪中)이던 10월 어느날 '충선왕이 김문연의 집에 가서 숙창원비(淑昌院妃)와 상대하여 시간을 보냈는데 비는 김문연의 누이동생이다.' 숙창원비는 충선왕이 아버지를 위해 헌상했던 젊은 과부 김씨가 후궁이 되면서 받은 칭호다.

여기서 '상대하여 시간을 보냈다(相對移時)'는 대목은 현장을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뭐라고 번역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보름 후 쯤에 '왕이 김문연의 집에 가서 숙창원비와 관계를 가졌으며 얼마 후에 그를 숙비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신이 들였던 아버지의 후궁을 다시 자신의 후궁으로 맏아들인 것이다.

이런 패륜(悖倫)을 정면으로 비판한 신하가 있었다. 우탁(禹倬·1263년~1342년)이라는 신진 관리였다. 조선시대로 치면 사헌부 말단에 해당하는 감찰규정(종6품) 우탁은 임금이 아버지의 후궁과 밀통했다는 소식을 듣자 소복을 입고 도끼를 들고서 짚방석을 멘 채 궁궐로 들어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측근 신하들은 그 내용의 신랄함 때문에 감히 읽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이에 우탁은 충선왕이 들으라고 신하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근신(近臣)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이와 같은 추악한 일을 저지르게 하였으니 그 죄를 아는가?" 왕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길로 우탁은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서 당시로서는 최신 학문이던 성리학을 연마하고 교육하며 생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숙비에 봉해진 김씨는 거칠 것이 없었다. '비는 밤낮으로 갖은 아양을 다 부렸으므로 왕이 그만 혹하여 정사(政事)도 보살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숙비 김씨는 최고의 사치를 누린 것으로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오빠 김문연(金文衍)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환속했으나 30살이 넘도록 벼슬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부였던 여동생이 하루 아침에 충렬왕의 숙창원비가 되자 정2품 첨의시랑찬성사에까지 오르고 다시 충선왕의 숙비가 되자 언양군에 봉해지고 원나라 고위 관직까지 얻었다. '고려사'는 김문연에 대해 '위인이 활달하고 마음이 솔직하여 늘 숙비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사치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리 못하게 억제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검소 정직했던 가풍이 김문연 쪽으로는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