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의(名醫)는 두말할 것도 없이 충렬왕 때의 설경성(薛景成)이다. 그의 뿌리에 대해 '고려사'는 "계림(경주) 사람이며 스스로 홍유후(弘儒侯·고려 때 추증된 작호) 설총(薛聰)의 후손이라고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집안 대대로 의술을 업으로 삼았던 집안이다.

설경성도 처음에는 의약을 다루는 상약의좌(尙藥醫佐)로 관리의 길에 들어섰으며 충렬왕이 병에 걸릴 때마다 설경성에게서 치료를 받고 효험을 보면서 이름을 날리게 됐다. 당시 원나라 황제 세조는 충렬왕의 장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고질병 치료를 위해 고려에서도 명의를 보낼 것을 명했다. 이때 뽑혀간 인물이 설경성이다.

설경성으로서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왕진(往診)길'이었던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약은 효과를 발휘했고 세조는 기뻐하며 집과 돈을 주면서 언제든지 궁중을 드나들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했다. 바둑에도 능했던 설경성을 총애한 세조 황제는 수시로 자기 앞에서 설경성이 바둑을 두게 하고서는 직접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2년 동안 북경에 머물던 설경성은 귀국을 간청했고 세조도 흔쾌히 허락하며 "대신 돌아가서 가족을 데리고 다시 오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내가 한사코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세조의 부름이 있을 때면 수시로 북경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세조가 준 재물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294년 31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던 세조가 죽고 성종이 그 뒤를 이었다. 성종이 병들자 원나라에서는 또 설경성을 불렀고 이때부터 그는 원나라에 남아 계속 체류하게 된다. 이쯤 되면 그는 고려국왕의 어의(御醫)라기보다 원나라 황제의 어의였던 셈이다. 그러면서 고려에서의 관직과 품계도 특진에 특진을 거듭해 찬성사(정2품)에까지 올랐다가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로서는 장수(長壽)였다.

설경성에 대해 '고려사'는 파격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설경성은 키가 크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성질도 근검하고 중후하였다. 중국(원나라) 황제의 총애도 받았으며 국왕의 총애도 받았으나 후손을 위하여 특별한 혜택을 바라지도 않았다." 의술보다 인품이 더 뛰어났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후손을 위하여 특별한 혜택을 바라지 않아도" 절로 잘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아들 설문우(薛文遇)는 문(文)과 만난다는 이름 그대로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그가 남긴 시가 훗날 조선 때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포함될 만큼 설문우는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설문우의 경우 아들보다는 딸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큰 인물들을 길러내게 된다. 그의 딸 하나는 고려말 명신(名臣) 이조년(李兆年·1269~1343년)의 아들 이포(李褒)와 결혼해 고려 후반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이인복 이인임 이인미 이인립 이인달 이인민 6형제를 낳았다. 고려 말 정치지형도 설명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인복과 이인임은 대조적이다. 이인복(李仁復·1308~1374년)은 공민왕으로부터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난다"는 탄복을 들을 만큼 중후한 처신으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고려사'에서도 명신(名臣)편에 분류돼 있다. 반면 이인임(李仁任· ?~1388년)은 일반적으로 우왕 때 최고의 권력을 누린 권간(權奸)으로 비판받으며 '고려사'에서도 간신(姦臣)편에 분류돼 있다. 능력 여하를 떠나 이성계 진영에 정면으로 맞선 댓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인미(李仁美)는 판서, 이인립(李仁立)은 밀직사 동지사, 이인달(李仁達)은 주부(注簿), 이인민(李仁敏)은 문하평리를 각각 지냈다. 이인달 외에는 5형제 모두 고위직에 올랐던 막강한 집안이었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 이직(李稷)이 이인민의 아들이다.

설문우의 또 다른 딸은 해주 정씨 집안의 정윤규라는 인물과 결혼해 먼 훗날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아들을 낳는다. 정역(鄭易·?~1425년)이 그 주인공이다. 우왕9년(1383년) 문과에 급제했을 때 동기생 명단에 '이방원'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고속출세를 달려 호조판서에 이르고 그의 딸은 효령대군과 혼인함으로써 태종과 사돈관계까지 맺었다.

물론 정역의 출세가 이방원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만은 아니다. 우왕9년 과거 당시 장원 급제자였던 동기생 김한로(金漢老)는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될 세자(양녕대군)의 장인이 됐지만 양녕의 몰락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역은 무엇보다 겸손 또 겸손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인물이었다는 점만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