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논픽션 대상(大賞)' 역사부문 우수상 수상작 '태극기'를 쓴 박충훈(朴忠勳)씨는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설(說)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본지 9월 14일자 보도

태극기가 대한민국 공식 깃발이 된 지 올해로 꼭 60년이다. 태극기는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에 의해 국기(國旗)로 제정됐다. 태극기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 고종 19년인 1882년이었다.

그간 태극기는 박영효(朴泳孝·1861~1939)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왔다. 일본에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가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에서 그려 1882년 9월25일 일본 숙소에 게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새 자료와 연구가 잇따라 나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태극기를 만든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1882년 5월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5월 14일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조선 대표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에게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제정하라고 요청했다. 김홍집이 "국기를 만들라"고 명령한 사람은 역관 이응준(李應俊·1832~?)이었다.

이응준은 5월 22일까지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 선상에서 국기를 만들었고 이 국기는 제물포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 이 '국기'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간 정확한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2004년 1월 획기적인 자료가 발굴됐다. 태극과 4괘를 갖춘 '조선의 깃발'이 실린 미국 해군부 항해국의 문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 윤형원 아트뱅크 대표에 의해 공개됐던 것이다.

지금과 비교할 때 4괘(卦)의 좌우가 바뀌고 태극 모양이 약간 달랐다. 세상을 놀라게 한 건 '1882년 7월 19일'로 기록된 책의 출간일자였다. 조미조약 체결 두 달 뒤였고 '박영효 태극기'보다도 2개월 이상 앞섰던 것이다.

1882년 5월 이응준 태극기 / 1882년 9월 박영효 태극기

작년 5월 열린 '국기 원형(原形)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이 태극기는 조미조약 체결 당시 걸렸던 '이응준 태극기'가 분명하다"는 데 동의했다.

이응준은 1850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증광시(增廣試) 역과(譯科)에 2위로 합격한 뒤 역관이 됐다.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조미조약 때 영어를 아는 청나라 역관을 통해 미국과의 통역을 담당했다.

1889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갔던 이응준은 귀국 즉시 체포돼 의금부에 수감됐다. 청나라 북양(北洋) 군벌의 실력자 원세개(袁世凱)가 "이응준이 왕을 속이고 2만 금(金)을 가로챘다"고 했던 것이다.

벌을 받고 하루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세종 때 장영실처럼, 이응준도 그 뒤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논픽션 '태극기'를 쓴 박충훈씨는 "'우리 청룡기를 국기로 쓰라'는 권유를 무시당했던 청나라가 조선의 국기를 창안한 이응준을 눈엣가시로 봤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럼 박영효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박영효의 일기 '사화기략(使和記略)'은 그가 준비해 간 '태극팔괘도'를 영국인 선장 제임스(James)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괘도'로 고쳤다고 기록했다.

학자들은 이 기록에 대해 조미조약 당시 '이응준의 깃발이 일본 국기와 혼동되니 팔괘도를 국기로 삼으라'고 했던 청나라 특사 마건충(馬建忠)의 건의를 자연스럽게 배제하기 위해 제임스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박영효는 이응준의 태극기에서 괘의 좌·우를 바꾼 태극기를 만들었고, 1883년 3월 6일 조선의 국기로 공식 선포됐던 것이다. '박영효 태극기'가 이런 모양이었음은 지난해 발견된 1882년 11월 1일 일본 외무성의 '요시다(吉田) 문서'가 뒷받침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