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

나는 지금 여기 없다.

여기란 누구나 다 알 듯이 이른바 공론(公論)의 현장이다.

공론의 현장. 오해의 여지가 많은 말이나 무슨 뜻인지는 또한 누구나 안다. 이른바 '입질'하는 자리다.

고 노무현 대통령 스타일로 말하면 '주둥이 까는 자리'다. '주둥이 까는 자리!'

나는 시골에 산다. 요즘 사는 곳은 알리고 싶지 않다.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알고 싶어도 알지 말아 주기 바란다.

왜 숨어 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뻔하다.

"내가 왜 숨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숨어? '×' 같아서 얼굴 돌린 것뿐이지!"

이 '×'이란 말 꼭 지우지 말기 바란다.

조선일보가 물론 '막말 코리아'란 특집까지 내면서 쌍소리 천국에 개탄을 거듭하는 줄은 잘 안다. 그러나 15세기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막말 천지였다. 르네상스의 도화선이었다. 지금 이 나라에 네오 르네상스가 오고 있다는 증거다.

르네상스 없었으면 오늘까지 세계를 잡아 흔든 유럽 권력과 서구문명은 없다. 그런데 그 네오 르네상스가 다가오는 발자국이 곧 막말이니 지우지 말기 바란다는 말이다.

시골구석에 앉아 못난 삶을 살아가는 주제에 왜 또 '주둥이 까는 짓'을 하려는 걸까?

정운찬씨 때문이다.

나는 정운찬씨를 좋아한다.

한 번 만나 밥 먹은 일밖에 없지만 그이의 경제 노선(路線)을 잘 알고 있다. 그이의 평소 삶의 태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그이를 참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1889~1970) 박사와의 인연을 알고 나서부터다.

무슨 얘기인가?

스코필드 박사는 정운찬씨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다. 박사가 하루는 정씨에게 물었다고 한다.

"돈 있어?"

"없습니다."

"줄까?"

"네."

"언제 갚을 건데?"

"못 갚습니다."

"어째서? 갚을 돈을 벌 자신이 없어서?"

"네."

"그래. 그래야 한다. 그런 태도로 살아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나는 그저 멀리서라도 그이 잘되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스코필드 박사가 항일 의사 강우규(姜宇奎·1855~1920) 선생 재판정에 참석했다가 나오면서 하신 말씀이라 한다.

"사람은 저래야 한다. 위기를 뚫고 가는 사람은 저렇게 분명해야 한다."

분명한 것.

맹자(孟子)는 이러한 태도를 두고 '명지(明志)'라 했다. '뜻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진솔한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동·서양의 판단이 같은 모양이다.

청문회에서 어딘가로부터 천만원을 받은 사실을 까발리는 공격 앞에 간단히 '그렇다'고 대답한 정운찬씨를 보고 나는 맹자와 스코필드 박사를 떠올렸다. 그래야 한다. 총리 못하면 어떠냐!

그러나 그 태도로 총리 한다면 이 위기 국면, 거대한 문명사 변동의 한복판인 한반도의 지금 이 국면에 평소의 그 소신과 경제·사회 노선의 그 원만하면서도 날카로운, 중도 진보의 참다운 빛을 보탤 것이 분명하다.

안 된 것은 자기들 자신이 대권 후보로까지 밀었던 사람을 천만원으로 잡아먹겠다고 벼르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이다.

지우지 말기 바란다.

그래!

한마디로 '×' 같아서 이 글을 쓴다.

그들이 지난 집권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나랏돈을 처먹었는지 너무도 잘 아는 내가 시골로 낙향할 만큼 얼굴을 돌려버리게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인 그들이 '주둥이 까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천만원짜리 개망신'을 사서 한다고 낄낄대는 이곳 시골 인심을 알려주는 것도 한 못난 애국이라 생각해서다.

그나저나 막말이 이리 질펀해서 국운(國運) 좋은 건 따 놓은 당상이다. 나 같은 욕쟁이가 입 닫고 공부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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