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좌민(35) 서울대 화학부 교수의 연구실 탁상 달력은 빈칸을 찾기 어려울 만큼 빽빽했다. "겨울에는 평소보다 더 바빠요. 이번 달에만 벌써 두 번 지방에 갔다왔어요."

강의 일정이 아니라 공연 일정이다. '앨범 출시 쇼케이스' '뮤직비디오 촬영' '대전 공연' 등 연예인 스케줄을 방불케 하는 메모가 달력에 가득했다.

남 교수는 두 장의 명함을 건넸다. 한 장은 서울대 교수 명함, 다른 한 장은 '컴패션밴드 팀리더'라고 적힌 명함이다.

남 교수는 지난해 7월 자선밴드 '컴패션밴드'에 가입해 지난 9월 리더가 됐다. 컴패션밴드는 국제 구호단체 '컴패션'이 조직한 밴드다. 멤버는 120명. 차인표·주영훈·황보 등 연예인 20여명을 비롯해 뮤지컬배우·사진작가·안무가·스튜어디스·공익근무요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자기가 잘하는 일을 돈 받지 않고 거드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다닌다. 수익금은 전 세계 25개국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돕는 데 쓴다. 작곡가가 노래를 만들면, 연예인과 일반인들이 한데 모여 노래를 부르고, 사진작가가 앨범 사진을 찍는 식이다.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카메라 감독과 음향 감독도 밴드 멤버다.

차인표·주영훈·황보 등 20여명의 연예인을 비롯해 교수, 뮤지컬배우, 사진작가, 안무가, 스튜어디스, 공익근무요원 등 120명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컴패션밴드의 단체사진. 컴패션밴드는 앨범 판매와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전 세계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돕는 데 쓴다.

남 교수의 '이중생활'은 방송사 PD인 친구의 소개로 컴패션밴드의 공동리더를 맡고 있는 가수 심태윤(33)씨와 만나면서 시작됐다. 심씨는 "(남 교수가) 나이로는 형인데 얘기를 해보면 동생처럼 느껴질 만큼 순수했다"며 "그 모습에 반해 함께 밴드를 하자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처음엔 한참 망설였다"고 했다. 그는 2006년 미국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곧바로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같은 해, 한국인 최초로 미국화학회가 주는 '빅토르K라머상'을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지 5년 이내의 젊은 과학자들 가운데 촉망받는 인재를 골라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밴드 하시는 분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거리였어요. 그동안 공부만 하고 살았잖아요."

별 생각 없이 보러 간 컴패션밴드의 무대가 그의 망설임을 부쉈다. 그는 "밴드가 공연을 마치자, 1000여명쯤 되는 관객들이 너도나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결연신청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남 교수는 마음을 굳혔다.

"전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이라 눈물을 흘려도 '그냥 잊어버리자'는 주의거든요. 그런데 밴드 공연을 몇번 보면서 같은 경험이 자꾸 반복되다 보니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남 교수는 대학시절 학생밴드 보컬을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쟁쟁한 동료들이 많아 정작 마이크를 한번도 못 잡아봤다. 컴패션밴드에 합류한 그는 밴드의 스케줄 조정, 공연 프로그램과 장소, 부대행사 섭외 등 굵직한 사안을 결정하는 '조정자' 역할을 맡았다.

남 교수는 "1년 반 동안 밴드를 하면서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했다. "살면서 남에게 도움을 준 적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의 따뜻한 손을 잡을 때마다, '정작 달라지는 것은 바로 나'라고 느꼈어요."

지난 20일 서울 압구정동 기아자동차 사옥에서 열린 컴패션밴드 앨범 발매 쇼케이스에서 남좌민 교수(왼쪽)와 가수 심태윤씨가 함께 사회를 보고 있다.

밴드의 공동리더 심씨는 "사람들을 만날 때 '이분은 서울대 교수'라고 소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넘어간다"며 "지식과 자기 위치를 의식하거나 내세우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해 회원들이 잘 따른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남 교수는 "초기에는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토론을 할 때 상대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어냈다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적도 있다"고 했다.

"도서관과 실험실에서 살아서 그런지 뭐든지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리더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데, 뻣뻣하게 서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나요. 몸을 굽히고 누워야죠."

배우 전예서(28)씨는 "남 교수님은 항상 공연연습이 끝날 때까지 남아서 지켜보고, 시간이 늦으면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서울대 화학부 김병문(52) 학부장은 "보통 서울대 교수는 빨라도 30대 중반~30대 후반에 임용된다"며 "남보다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사람이 봉사활동까지 하다니 참 대단하다"고 했다.

남 교수 스스로는 "젊은 나이에 임용돼 연구실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했다. "밴드에 참여하면서 마음이 많이 충전됐어요. 처음에는 교수란 직업이 밴드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해 보니 결국 같은 일이더라고요. 교수는 지식을 나누는 일이고, 밴드는 마음을 나누는 일이란 것만 달라요."

컴패션밴드는 28일 오후 6시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공연한다. 문의 (02)3668-3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