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화보 주간지 '그래픽'(1902년 2월 8일자)은 영국의 한 판화작가가 서울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한 그림을 실었다. 그것은 대표적 민속놀이인 석전이다.

음력 대보름에 서울의 삼문(동·서·남대문) 밖과 애오개(阿峴)사람들이 만리재에 모여 석전(石戰)을 했다. 승패는 전국적인 관심사였다. 삼문 밖 쪽이 이기면 기내(畿內)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 쪽이 이기면 여타 지방에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전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만리재로 모여들었다.

영국의 한 판화작가가 서울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한 그림

"석전을 구경하기 위해 군중들이 서대문을 빠져나갈 때면 초대형 전차가 운행된다. 작년 어느 날에는 3만4000명이 동원되었는데 이와 같은 숫자는 평년의 2배에 해당한다. 그날 서울 주변에서 2만5000명이 석전을 구경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대한제국멸망사')

석전의 역사는 고구려가 수나라 대군을 물리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전은 기마전과 함께 상무정신을 기르는 놀이이며 석척희(石擲戱·돌을 던지는 놀이) 또는 편전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축제였으며 대담성과 용맹·패기를 북돋움으로써 민간의 방어능력을 배양하였다. 조선 태조는 재위 3년에 돌 던지는 놀이꾼을 모아 척석군(擲石軍)을 조직하였으며 세종은 석전대를 두 패로 편성하고 종루에 올라 석전을 구경하였다. 석전이 유명한 곳은 평양·송도·서울 같은 대도시였다.

석전을 본 서양인들은 마을 간의 다소 과격한 대항전 정도로 여겼다. "미국인들이 자기 도시 소속 야구선수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만큼 한국 사람들도 자기 마을의 투석꾼을 자랑스러워한다."('더 코리아 리뷰') "석전은 대단한 국가적 시합이며 비록 사소한 사고로 즉사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미식축구와 비교하면 석전으로 매년 죽거나 불구자 되는 사람들의 수가 더 적을 것이다."('1900 조선에 살다')

그러나 침략국 일본의 입장에서는 석전을 전통놀이의 하나쯤으로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었다. 러일전쟁의 막바지인 1904년 12월 말부터 일진회가 대안문(덕수궁 정문) 앞에서 연일 반정부 시위를 벌이자 이를 해산하려 군대가 출동하였다. 일진회 회원들이 줄행랑치자 근처에 몸을 숨기고 사태를 주시하던 일본 군인과 경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지켜본 스웨덴인 아손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어서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 군인들이 밀리기 시작하여 곧 완전 패배의 쓴잔을 맛볼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근처에 운집해 있던 수천 명의 군중들이 일본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특히 투석전에 뛰어났다."('100년 전 한국을 걷다')

일본은 석전을 무예 훈련으로 여겨 군대를 파견해 엄금했다. 1908년 음력 정월 그믐 마침내 서울에서 석전이 금지되었다('매천야록'). 문명의 눈에는 야만의 놀이였지만, "편전에 나타나는 우리 조선 사람들의 용기란 결코 우습게 볼 용기가 아니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편전 그것이 오늘 소위 문명한 권모술수의 싸움보다 간단하고 직접 행동인 만큼 보는 이의 피를 더욱 끓게 하던 것이었다."('별건곤',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