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의 기습/벼락 투·개표'.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 야당 의원들이 서울 태평로 국회 단상을 점거하고 있는 가운데 길 건너 국회 제3별관에서 공화당이 3선개헌안과 국민투표 법안을 변칙통과시킨 사실을 전한 조선일보 호외(號外)의 제목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열어주는 3선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65.6%의 지지를 받아 확정됐다.

이로써 권력과 언론의 균형추는 무너져내리고, 권력의 일방독주가 시작됐다. 1970년 8월 17일 법무부는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의 원내발언일지라도 그 내용이 현행법에 저촉될 경우 이를 게재하거나 보도한 언론기관에 대해 민사 또는 형사상의 책임을 지울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발표했다. 국회와 언론을 동시에 압박하려는 시도였다. 8월 21일자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당치도 않은 법무부 해석'이다. 언론계·법조계·학계뿐 아니라 여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제기되자 결국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 선포 후 18일 연세대에 계엄군이 진주하는 모습.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특히 1971년은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유무형의 언론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해 4월 17일 조선일보 기자 150명이 사내에 모여 '언론자유수호대회'를 가졌다. 이를 전한 조선일보 사보 기사는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학생데모대에 취재기자가 돌팔매질을 당해야 할 만큼 언론이 불신의 대상이 된 현시점을 절감, 본사 기자들은 스스로의 無氣力(무기력)을 통감하고 지난 4월 17일 언론자유수호 선언대회를 가졌다.'

그에 앞서 제15회 신문의 날을 맞은 4월 7일 조선일보는 사설 '한국언론의 심각한 自省(자성)'을 통해 정부의 언론관을 간접 비판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를 보도한 1972년 10월 18일자 조선일보. 정부 비판을 할 수 없는 언론 암흑시대의 서곡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일부 젊은 층에서는 新聞不信(신문불신)의 소리까지 나오고 심지어 신문에 종사하는 우리 대다수 언론인도 과연 오늘의 신문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관해 회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4월 27일 김대중 후보를 어렵사리 이기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강권통치를 본격화했다. 7월 1일 7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6가지 선언항목 중 세 번째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와 여섯 번째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협박이었다.

1971년은 대통령 선거 전후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봄까지만 해도 편집국에서 언론탄압 규탄대회를 열 정도였고 지면을 통한 온건한 비판은 가능했지만, 가을이 되면서 거의 모든 신문에서 정부 비판이 사라졌다. 조선일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2월 7일자 조선일보 사설이다. 정부의 압력으로 다른 신문들과 거의 비슷한 논조로 국가비상사태 선포의 불가피성과 긍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12월 27일 새벽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날치기 통과됐다. 그 중 제8조가 언론 관련 조항으로 국가안위에 관한 사항, 국론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는 사항,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장할 위험이 있는 사항에 관한 언론출판의 규제가 골자였다.

1972년은 한국 언론이 암흑기로 접어드는 첫해로 기록됐다.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포고 1호는 언론출판의 검열이었다. 비상계엄 70여일 동안 모든 신문사는 조판을 마친 물묻은 대장을 들고 서울시청(도는 도청) 검열실에 가서 검열관으로부터 '검열필(畢)' 도장을 받아야 신문을 인쇄할 수 있었다. 일제 때나 5·16 직후에도 검열이 있었지만, 그때는 기사가 삭제된 흔적 그대로 인쇄돼 독자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언론탄압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검열에 걸릴 경우 다시 조판하도록 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검열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의도가 드러난 것은 열흘 후인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였다.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유신적 개혁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시키고 새 차원의 민주체제를 정립시키겠다." 이른바 '10월유신'의 시작이었고, 언론계로서는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이제 한국언론은 보도 및 비판 기능의 위축이나 약화가 아니라 사실상 마비 상태에 접어들게 됐다. 조선일보도 길고 긴 고통의 터널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