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건 제주도 진미명가 점주, 조리사

"아버지, 학교에서는 이렇게 안 배웠어요. 요즘 손님들은 웰빙이 중요하니 우리도 요리법을 좀 바꿔봐요!"

요리관련 대학을 나와 나랑 주방에서 함께 조리를 하고 있는 아들놈의 잔소리가 또 시작됐다. 그때마다 나는 들은 체도 않는다. '이놈아, 내 조리법은 20년 넘게 내 손님들이 가르쳐 주신 거다.'

돌이켜보면 내가 생선회 중에서도 특히 제주의 명물 다금바리에 전념하게 된 것부터 손님의 권유 때문이다. 옛날부터 제주도에서는 큰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을 때 시부모가 대를 잇게 해주어 고맙다는 표시로 출산 3일째 되는 날 다금바리 미역국을 내놓았다. 모유도 많아지지만 무엇보다 산모들의 젖몸살을 덜어준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이런 다금바리와 내가 평생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7년 서울의 한 요리모임에 참석했다가 만난 조선일보 이규태 선생의 권유 때문이다. 당시 이규태 선생은 일본의 마구로(참치)를 예로 들면서 "회를 부위마다 특화하여 가격도 차별화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제주도만의 특산물을 부위마다 특화하여 요리할 수 있는 생선이 뭐가 있을까?" "다금바리다." 요즘처럼 다금바리가 비싸지 않을 때라 이후 나는 거의 매일 한 마리씩 제물로 삼아 부위별 맛을 찾아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이후 수영을 좋아하지만 해수욕은 절대 하지 않는다. 다금바리의 보복(?)이 두려워서다.

우리 집은 다금바리 매운탕을 낼 때 주방에서 개인별로 그릇에 담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 또한 한 단골고객의 가족모임에서 비롯됐다. 대가족이다 보니 시부모님과 큰아들 부부가 한 상에 앉고 나머지 아들 부부와 아이들은 다른 상에 앉았다. 큰며느리를 보니 바늘방석이었다. 옆에서는 맘껏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시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큰며느리는 시부모님과 남편 국물 뜨느라고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큰며느리 분량의 다금바리 서덜(생선의 살을 발라낸 나머지 머리 뼈 껍질 등)은 주인을 맞이하지 못한 채 식어버렸다. 이후 내가 좀 바쁘더라도 주방에서 개인별 배식을 원칙으로 삼았다. 익숙한 큰 냄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집의 원칙이라는 걸 아시고 다들 잘 참아주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일본인 고객들은 요리사로서의 자부심을 갖도록 해주었다. 20년 전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김윤환 의원이 한·일 국회의원 20여명을 동반하고 우리 집을 찾았을 때다. 다금바리 맛을 본 일본측 대표가 부른다고 해서 방에 들어갔더니 자신이 앉았던 방석을 내게 내밀며 앉으라더니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일본 사람들이 요리사를 제대로 대우한다는 말은 여러 차례 들었지만 내가 실제로 그것을 겪어보니 요리사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정치인들도 이후 수없이 방문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런 일은 없었다. 장인(匠人)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우리 풍토 탓인가.

한 번은 주말 점심시간인데 손님이 몰렸다. 혼자 요리하던 때라 음식을 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급기야 나보다 분명히 어려보이는 손님이 주방까지 와서 얼굴을 들이밀며 '좀 빨리 줘요, ○○'이라고 욕을 하는 게 아닌가? 젊었을 때야 멱살잡이라도 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것도 고객들이 가르쳐주셨다. 음식은 맛과 함께 멋도 즐기는 행위라는 것을. 꾹 참고 요리를 마친 다음 서빙을 위해 방에 들어가 한마디 했다.

"○○은 한자로 十과 八. 합치면 나무 木입니다. 오늘 나무 심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준비했으니 그 정성까지 맛있게 드십시오." 다른 손님들은 영문을 모르고 내 얼굴을 쳐다보는데 아까 그 사람, 머쓱하니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가끔 경기도 안산이라며 전화가 온다. "안산의 ○○ 동생입니다." 그가 제주를 찾으면 나는 안주를 내고 그는 양주 한 병을 낸다.

사실 골프를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다금바리를 시작할 무렵부터 단골이 돼 지금도 종종 찾아주시는 서울의 한 고객과의 약속 때문에 골프를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 그때 그분과 이야기하던 중 세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부동산 소개 안하기, 둘째 아들에게 칼과 도마를 물려주기, 셋째 아들이 낸 회와 내가 낸 회의 맛이나 모양을 단골 고객들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됐을 때 골프를 배우기이다. 부동산 소개로 쉽게 돈을 벌게 되면 다금바리 요리와 손님 접대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이 약속은 물론이고 두 번째 약속도 지켰다. 5년 전부터 아들과 함께 같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 번째 약속이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도민(道民) 우대 골프장이 많이 생겨 주변에서 골프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 함께 하자는 유혹이 거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 내가 고객들로부터 배운 것을 하나로 녹여냈을 때가 내가 골프클럽을 잡는 날이 될 터인데 그날이 언제가 될지 아직 모르겠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지금도 "아빠,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요"라는 말을 입에서 떼어버리지 못한다. '아이구, 까짓것 골프 못하면 어떠랴! 아들놈이 나보다 뛰어난 다금바리 요리사만 된다면!' 이렇게라도 자위하며 시간이 날 때면 가끔 선물로 받아놓은 골프채를 만지작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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