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인(24)은 이화여대, 경인(20)은 서울대생이다. 둘 다 미대 조소과다. 경기도 가평에서 초·중·고교를 다니며 보습학원이나 과외 한 번 받아본 적 없이 대학에 갔다. 그런 자매가 자주 가는 곳이 한군데 있다.

자인이 백일(百日) 날, 산에 미친 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를 등에 업고 인수봉에 올랐다. 둘째 경인은 고등학교 때 로체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다녀왔다. 두 딸이 말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뒤를 잇겠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대(代) 이을 딸을 둘이나 가진 아버지 청곡(淸谷) 김시영(金時泳·52)은 도공(陶工)이다. 청자 못지않게 화려한 흑유(黑釉)를 빚어내는 그가 말했다. "좋은 도자기는 대를 이어야 나오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해주니 기분 좋다."

가평읍에서 태어난 김시영은 7살 때 서울로 유학갔다. 재일교포 출신 서예가 두남 이원영(2008년 작고) 집에 살며 학교를 다녔다. 이원영은 그에게 먹을 갈게 하며 인생 덕담(德談)을 들려줬다.

도공 가족이 나란히 앉아 앞을 바라본다. 앞에는 아버지 김시영이 만든 서가흑유대호(瑞加黑釉大壺)가 우뚝 서 있다. 어느덧 두 딸 자인, 경인도 아버지와 함께 한길을 걷고 있다.

"아이야, 넌 커서 예술가가 되거라…." 일본에 다녀올 때면 어김없이 이원영의 손에는 아이에게 줄 도구와 장비 보따리가 쥐여 있었다. "커서 장인(匠人)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그래서 간 학교가 용산공고 금속과다.

1974년, 그곳엔 작은 용광로가 있었다. 거기서 불을 알게 됐다. 불 세례 받은 금속이 전혀 다른 질감과 소재로 환생하는 장면. "연금술사를 꿈꾸게 됐다"고 그가 말했다.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한번은 철학책을 읽는데, 옆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며 막 떠드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내려놓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쳐버렸다." 두꺼운 나무책상이 주먹 한 방에 박살이 나버렸다.

김시영의 상상력은 또 다른 곳으로 튀었다. "모스크바올림픽에서 복싱 금메달을 따리라." 가평에서 씨름으로 이름 날린 큰형을 비롯해 집안에는 장사가 가득했다. 낮에는 불과 책을 만났고 밤에는 샌드백을 두드렸다.

훗날 고교 은사 한 사람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문제아 하나가 고려 흑자를 재현했다." 김시영은 연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77학번 공학도의 목표는 연금술사였다.

그런데 그만 산(山)을 만나고 만 것이다. 3학년 때 산악회에 들어갔다. 완전히 미쳐버렸다. 산악회는 철저하게 입회 기수 중심이다. 군대다. 일찍 입회한 같은 학번들을 선배로 모시며 산을 다녔다.

홍옥주(洪玉珠)라는 홍일점 '전입 고참'은 동갑내기 김시영을 '빠따'로 두드려패며 산을 가르쳤다. 빠따는 사랑으로 이어졌고 둘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그게 백일날 인수봉에 간 큰딸이다.

산은 그에게 도자기를 점지해줬다. 홍옥주와 산을 다니며 화전민 터를 지날 때, 그는 흑유 파편을 봤다. 어떻게 도자기가 까맣지? 궁금증은 커져갔다. 신소재 공학도의 호기심이 훗날 김시영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다녀와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 연구원에 들어갔다. 세라믹 연구가 목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칼 같은, 그런 첨단 소재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세라믹 회사 공장장도 했다. 여전히 꿈은 연금술사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천에서 만난 노(老) 도공들은 그에게 창작욕을 심어줬다. 도자기의 곡선, 흙과 유약과 불이 만드는 오묘한 색과 무늬, 질감이 그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흑유 파편이 부활했다.

연세대 대학원 세라믹공학과에서 재료부터 연구했다. 낮에는 직장에 다녔고 밤에는 재료를 연구했다. 1990년 석사를 마치고 나서 1991년 아예 직장을 때려치우고 고향에 가평요(加平窯)를 차렸다.

김시영이 말했다. "흑유는 불길의 성격에 따라 그 색과 무늬가 크게 달라진다. 요변(窯變)이라 하는데 유약과 흙이 화염 속에서 변성이 되면서 삼라만상이 창조된다. 그 맛 한번 보면 눈에 아무것도 뵈지 않는다."

아버지는 흙에 미쳤지만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아내는 아버지 대신 아이들을 엄히 길렀다. 김시영은 10년간 불길과 흙을 '연구'했다. "데이터를 다 기록했다. 그릇을 어디에 넣으면 어떻게 되고 기타 등등."

이후 10년은 창작이었다. 옛 선조들처럼 감(感)에 의존하는 작업과 사뭇 다르다. "공예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쉽다. 그렇게 연구를 하면 나중엔 감(感)이 생긴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숫자를 보지 않는다.

그가 만든 '검은색'은 무궁무진하고 오묘하다. 블랙홀처럼 주위를 빨아들이는 흑색, 세상 모든 것을 내튕길 듯 빛나는 검은색, 불길이 닿은 곳에 요변이 생겨 그려진 매화, 설산(雪山), 바다가 그 검은 우주 속에 있다.

시골에 은둔해 그릇을 만드는 가난한 도공을 1997년 천주교 춘천교구 장익 주교가 알아봤다. 주교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도공을 소개했고, 그리하여 흑유 도공 청곡 김시영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이후 콜렉터들이 대거 생겨나 작품들이 팔려나갔다. 2009년 일본미술구락부가 펴낸 '미술가명감(美術家名鑑)'에는 김시영의 말차다완(抹茶茶碗) 감정 기준가격이 97만엔이라고 적혀 있다. 작은 찻잔이 1000만원이다.

미술가명감은 일본 경매회사들이 기본적으로 참고하는 예술가들의 리스트다. 중국, 한국, 일본 3국에서 드물게 작업하는 흑유(黑釉)의 대가(大家) 열반에 그가 올랐다.

세월은 덧없다. 사내가 흙에 매진하는 사이에 아내는 11년 신장병을 앓다 2008년 4월 별이 됐다. 김시영이 말했다. "그가 그립다." 그 해 김시영은 홍옥주를 그리는 작품전을 가졌다. 주제는 설산(雪山), 그녀를 만난 곳이다.

도공이 아내를 그리워하며 두 딸과 작품을 만든다. 딸들은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귀여운 딸처럼, 때로는 냉혹한 혹평을 던지는 동료 예술가로 아버지를 보듬는다. 김시영이 말했다.

"내가 흑유를 만든 게 아닌 거 같다. 흑유가 자생력이 있어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게 틀림없다. 10년 됐다, 그런 느낌 드는 거." 연금술사를 꿈꾸던 사내가 이제 대를 잇는 어린 후배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