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8월 장충체육관 FMC대회 1라운드

일본인 선수의 태클을 막다 왼쪽 손가락 3개와 오른쪽 손가락 하나가 동시에 부러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팬들 앞에서 기권할 수는 없었다. 누워서 하는 기술로 버티며 3라운드를 마쳤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결과는 판정패. 경기 후 병원으로 실려가 손가락에 철심을 박았다. 의사가 살펴보더니 버럭 소리질렀다. "이런 손가락으로 경기를 치르다니…당신 미친 거 아니요?"

# 2009년 12월 일본 K-1 다이너마이트

갑자기 경기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열흘간 12㎏를 감량했다. 링에 오르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코뼈가 부러졌고 안와골절로 눈 주위가 심하게 부어올랐다. 경기가 끝나자 다시 병원행(行). 다행히 입원기간은 한달에서 보름으로 줄었다.

# 2010년 6월 싱가포르 마셜 컴뱃2

2년8개월 동안 승리가 없었다. 5라운드 경기는 생애 처음이었다. 은퇴의 기로에서 후회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짜릿한 TKO승이었다.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른 채 마이크를 잡고 응원 온 교민들에게 외쳤다. "제 팬이 되어주십시오. 여러분이 제 팬이 되어주시면 깨지고 박살 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노장 파이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김종만(32)은 한국 격투기 1세대다. 국내 격투기대회의 효시인 2003년 스피릿MC에 출전한 선수 중 지금까지 현역인 파이터는 김종만이 유일하다. 그의 대전료는 200만원이 채 안 된다. "격투기 시작 후 배부른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래도 어쩝니까? 좋은걸요."

격투기의 길

김종만은 '주먹 자랑을 하지 마라'는 전남 보성군 벌교 출신이다. 그래도 싸움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공부를 위해 순천삼산중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하얀 도복에 이끌려 유도부에 들었다.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훈련 때만 잘한다고 해서 '연습용'이란 소리를 들었다. 고 3때 유도부 주장이 됐다.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착실히 운동만 한 것은 "경찰서 갈 일은 절대 만들지 마라"는 아버지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1996년 출가해 스님이 된 아버지는 김종만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격투기 1세대로 한국 격투기의 부침을 바라본 김종만은“한 번 더 도약할 시간이 올 것”이라며“투혼이란 단어로 기억되는 파이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 격투기 무대에 올랐을 때 김종만은 '특전사 파이터'로 통했다. 유도를 접고 일반 대학에 진학한 김종만은 1학기를 마치고 특전사에 지원했다. 제복이 멋있어 보여서였다. "그때 북한 잠수정이 동해로 침투했어요. 작전에 투입됐죠. 제가 링 위에서 겁이 없는 것도 그때 경험 때문입니다." 전역 후 경호업체에서 일하던 그는 친구가 보여준 격투기 동영상에 마음을 뺏겼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느낌이었다. 마침 한국엔 격투기의 바람이 불었다. 스피릿MC 1회 대회에 참가한 김종만은 32강전에서 상대의 삼각 조르기에 기권패했지만 패배의 기억마저 달콤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란 확신이 들었다.

좌절과 영광들

경호 일을 그만두고 '전업 파이터'로 변신한 김종만에게 격투기를 보며 식사를 하는 스포츠클럽 '김미파이브(Gimme Five)'는 최고의 무대였다. 김종만은 1m70의 작은 체격에도 100㎏ 이상의 거구를 쓰러뜨리며 인기를 얻었다. 13연승을 달리는 등 20승2패를 거뒀다. 승리 후엔 귀여운 엉덩이춤으로 팬 서비스를 했다. 하지만 김미파이브에서 활동하던 선수가 경기 후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고가 일어나며 김종만은 뛸 무대를 잃었다.

"낮엔 공사판에서 일하고, 밤에 훈련했어요.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2005년 K-1 히어로즈대회에 출전하며 메이저 무대를 경험했지만 이후엔 출전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자국 스타를 키우려는 일본의 K-1은 김종만에게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예정됐던 경기가 네번 연속 갑자기 취소되며 1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김종만 경력의 하이라이트는 2007년 10월의 슈토대회였다.

메인이벤트에서 일본의 실력자 히오키 하츠와 맞붙은 김종만은 난타전 끝에 2대1 판정승을 거뒀다. 이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격투기 전문지 '셔독(sherdog)'의 세계 페더급 랭킹에서도 8위에 올랐다. 한국 격투기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김종만은 생애 최초의 팬 사인회에서 사인하느라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유쾌한 경험을 했다.

난 파이터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종만은 여전히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더구나 한국의 격투기 열기는 눈에 띄게 식어갔다. 2008년 이후 김종만은 긴 슬럼프를 겪었다.

팬들을 위한 화끈한 타격 중심의 경기 스타일은 쉽게 상대에 읽혔다. 연패가 거듭되자 지난해 그는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비록 알아주는 이는 많지 않지만 제 경력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1세대로서의 자존심도 있었고요."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마셜 컴뱃2 챔피언에 오르며 다시 힘을 얻은 김종만은 이번 달 일본 격투기 단체인 판크라스 페더급 타이틀전에 나서려 했지만 왼쪽 팔목 건염이 악화하며 경기 일정을 뒤로 미뤘다.

부상을 달고 다니지만 그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느냐"고 반문한다. "격투기를 하는 동안 늘 배가 고팠어요. 온몸엔 상처투성이죠. 그래도 계속 싸울 겁니다. 난 파이터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