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헤어지자는 그 사람에게 매달리는가?

섹스를 하고 나면 뭔가 많이 바뀐다. 섹스 이후에도 전처럼 관계가 이어지면 좋을 텐데, 실상 그렇지 못하다. 섹스를 하면 일단 상대와 헤어진다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고, 섹스라는 것은 한번 하면 헤어질 때까지 계속 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그래서 첫 섹스가 중요하다.

"자고나면 더 친해질 수 있어. 내숭 떨던 것도 사라지고, 말도 편하게 하고…."

그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섹스가 오히려 거리감을 좁히고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할 수 있다는 것. 한 침대를 쓰면, 어색했던 부분이 무너지면서 서로를 편하게 느끼게 되지만, 그러한 친밀함은 스스로의 본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 상대방을 당황하게 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말이 있다.

나 역시 감출 것을 감추는 관계를 선호하는 까닭에 섹스 후에 급격히 친해지거나 서로를 쉽게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섹스를 하게 되는 것과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의 요구에 응하는 족쇄가 되는 것이 싫다.

새삼 순결 문제를 다시 운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섹스를 했다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 것 같다. 연애 초기, 먼저 구애를 하는 쪽은 대개 남자이다. 남자가 먼저 전화를 걸고 데이트를 신청한다. 분명 처음에는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자가 남자를 더 좋아하는 쪽으로 바뀐다. 이러한 관계 속에 여자는 고민에 빠진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왜 그 사람이 변한 걸까?' 하고. 무엇이 연애의 판세를 바뀌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섹스이다.

애인에게서 섹스 제안을 받을 때 솔직히 거부감은 없다. 간만에 욕구불만도 풀고 싶다. 하지만 하고 나면 교묘히 바뀌는 관계의 구도 때문에 겁이 날 뿐. 섹스 전에 여자는 마음껏 튕길 수 있고, 그 남자를 미련 없이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하고 나면 어려워진다. 마치 섹스 때문에 무슨 노예라도 된 것 같다.

깊은 관계를 나눈 상대와의 이별은 쉽지 않다. 친구 영의 경우, 섹스 문제와 관계없이 언제든 쿨하게 헤어질 수 있다고 단언했지만, 그게 정말 가능할까. 언젠가 이별을 고하던 그에게 다짜고짜 매달린 적이 있다. 혼자 전화하고 수없이 메시지를 보내면서 나는 스스로 못난 사람이란 것을 인증했다. 섹스만 안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나도 '귀한 집 자식'이라는 것도 잊고 바닥까지 비참해지고도 상대에게 사랑을 애원했다. 스스로에게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하고 물어도 답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직접 매달리는 것보다 상대방이 매달릴 때 더 고역이다. 언젠가 잠시 데이트를 즐겼던 남자가 나의 변심에 며칠 간 매달렸다. 스킨십 없는 가벼운 데이트에 그쳤으므로 나는 이별에 자신있었다. 찰거머리 같은 그 남자의 연락을 매몰차게 무시했지만, 나는 내가 상대방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누군가가 나에게 매달리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매달렸던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한때 마음 주었던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본다는 게 얼마나 민망한가. 지금 생각해보니, 마음 떠난 그에게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이별에서 나는 선의의 피해자이고 상대방은 순정을 짓밟은 '나쁜 놈'이라는 구도를 만들면서 매달리는 행동자체에 어떤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사랑은 원하면 오지만, 구걸하면 절대 오지 않는다. 매달려서 다시 관계를 회복해보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사랑이 없이도 섹스를 했다는 것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굴레는 평생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 남자와 섹스할 만큼 섹스하고, 그 남자와 사랑할 만큼 사랑하고, 그 남자에게 질릴 만큼 질리면 섹스와 상관없이 헤어질 수 있다. 섹스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와 이별을 겪을 때 상대에게 매달리는 이유는 아직 충분히 그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누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